수유리 계곡 송계별업 터에 얽힌 사연
수유리 계곡 송계별업 터에 얽힌 사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8.12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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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셋째 왕자 인평대군이 조성한 별장…그 후대가 몰락하며 훼손

 

북한산성 대동문에서 강북구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내려오면 커다란 바위에 폭포가 세차게 흘러 내리는 곳이 있다. 이름하여 구천폭포다. 폭포 상단에 구천은폭(九天銀瀑)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구천폭포는 동령폭포, 개연폭포, 청수폭포와 함께 북한산 4대 폭포로 꼽힌다.

오늘 따라 수량이 풍부했다. 서울에 며칠동안 폭우가 내린 직후였기 때문이다. 구천계곡은 조계동(漕溪洞)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이 골짜기에 조계사가 있었다고 한다.

폭포 아래 평평한 곳에 송계별업 터(松溪別業址)란 표지판이 붙어 있다. 전에 없던 것이 생겼다. 이 곳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2019년이다.

한해 전인 2018년 구천폭포에서 '송계별업(松溪別業)' 바위글씨가 발견되었다. 한국산서회 조장빈 인문기행 팀장이 이 글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글씨가 전문가들의 공인을 받아 이곳이 송계별업 터로 지정된 것이다.

 

구천은폭 각자 /문화재청
구천폭포 /박차영

 

송계별업은 인조의 셋째 왕자인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1622~1658)1646년에 풍광이 아름다운 구천계곡 일대에 조성한 별장이다. 자신의 호를 따서 지었다. 송계별업에는 보허각, 영휴당, 비홍교 등의 건축물이 계곡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나, 현재 건물과 다리 등은 모두 소실되고, 구천은폭과 송계별업의 바위글씨와 건물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되는 터만 남아 있다.

 

구천은폭 각자 /문화재청
구천은폭 각자 /문화재청

 

인평대군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셋째 아들로 소현세자와 효종의 동복동생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부왕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따라갔다가 1640년 볼모로 선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풀려나 귀국했다. 둘째형 효종이 즉위한 이후 4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인평대군은 구천계곡에 애착을 느꼈다. 그는 이곳에 머물기도 자신의 호를 송계(松溪)라 짓고, 문객 이신(李伸)에게 구천은폭이란 글자를 폭포 옆에 새기게 했다. 그러나 그는 1658년 나이 설흔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낫다.

 

송계별업 각자 /문화재청
송계별업 각자 /문화재청

 

송계별업은 후대에 훼손되었다. 그 이유는 인평대군의 아들들이 당파싸움에 휘말렸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송계별업은 인평대군 아들대에도 가끔 이용했다고 한다. 인평대군의 아들 복창군 이정(李楨), 복선군 이남(李枏)과 복평군 이연(李㮒)은 정치에 깊숙이 관련되었는데 특히 남인들과 친밀했다. 남인이 몰락하면서 송계별업도 주인을 잃고 방치되었다.

언젠가부터 송계벌업 자리에 채석장이 들어섰다.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인 사릉(思陵)의 석재를 쓴다는 이유였다. 근처에 왕릉의 석재를 채취하는 대부석소(채석장)가 설치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사릉 부석소 관련 각자에서 그 정황을 가늠케 한다. ‘사릉부석감조필기각자 기록은 다음과 같다.

司評李焌 / 奉事趙正誼 / 書吏朴興柱 / 石手趙金

歲己卯正月日 / 思陵浮石監役 / 畢後書記

 

부석금표 각자석 /박차영
부석금표 각자석 /박차영

 

이곳이 부석소로 선정된 것은 석질이 굳고 강했기 때문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웠지만, 속셈은 인평대군의 아들들이 남인들과 결탁해 음모를 꾸미던 장소를 장소를 철저히 훼철한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구천은폭송계별업각자가 남아 있게 되었다. 그 각자만 님긴 것은 인평대군을 모둑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송계별업은 그렇게 훼철되게 되었고, 자연스레 송계별업의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면서 구천은폭폭포만이 볼만한 장관으로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송계별업은 훼철된 채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사릉의 석물 채석이 이루어진 뒤에 부석금표(浮石禁標)’라고 새겨놓은 각자가 골짜기 입구 큰 바위에 남아 있다.

부석금표가 언제 새겨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초의 부석이 이루어진 1626년 이후로 판단된다. 민간에서 석재를 채취하는 것을 금지한 것은 조선왕실에서 국장(國葬)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런데 인평대군의 송계별업 터에서 석재 채취가 이루어진 것은 부석소의 선정과정에 정치적인 고려가 더 컸을 것이다.

2019년 서울시는 송계별업 터를 서울시문화재 자료 제75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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