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링 오디세이②…시베리아 횡단
베링 오디세이②…시베리아 횡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8.12 1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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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츠크까지 2년에 걸린 대장정…표트르 사후 까탈스런 지방총독들

 

표트르 대제는 정력적인 군주였다. 그는 서유럽을 직접 순방해 앞선 문물을 견학하고 국내에도 현장을 구석구석 누비며 다녔다. 그러다 나이 50에 요로결석증에 걸려 1924년 여름에 대수술을 하고 가을엔 회복되는가 싶었다. 건강이 회복되며 차르는 일 욕심에 다시 시찰에 나섰고, 11월의 어느날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한 철공소를 방문하던 중에 병사가 바다에 빠진 것을 보고 몸소 뛰어 들어 구출했다. 찬 바다에 뛰어든 것이 그의 병을 재발하게 했다고 한다.

표트르가 비투스 베링에게 시베리아와 아메리카 연결부분을 탐사하라고 명령한 것은 19241229일이었다. 그때 차르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베링도 원정을 서둘렀다. 대원을 조직하고 예산도 타내야 했다.

베링은 우선 자신의 일을 보조해줄 두명의 부관을 선발했다. 하나는 같은 덴마크 해군 출신으로 러시아 해군으로 적을 바꿔 복무한 마르틴 스팡베르그(Martin Spangberg)였다. 또다른 한사람은 러시아 해군사관학교 출신 알렉세이 치리코프(Aleksei Chirikov)였다.

베링은 치리코프에게 선발대를 이끌고 먼저 출발하도록 했다. 1725124일 치리코프는 34개 조 가운데 26개 조를 이끌고 볼로그다를 향해 떠났다. 베링은 서류작업을 마무리하고 물자와 대원을 채워 26일 상트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났다. 이틀후 표트르 대제는 숨을 거두었다.

베링은 당시로는 최신의 지도를 확보하고 떠났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겨울이어서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고, 썰매를 타고 동쪽으로 661km를 달려 214일 볼로그다에서 베링은 먼저 도착한 치리코프 일행과 합류했다.

 

비투스 베링 /위키피디아
비투스 베링 /위키피디아

 

흔헤 비투스 베링(Vitus Bering)은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베링해와 알래스카의 알류산 열도를 탐험한 해양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바다를 탐험한 시간보다는 육로로 그 먼곳까지 간 시간이 더 길다.

베링 일행은 수도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오호츠크해까지 가는데 햇수로 3, 기간으로는 2년의 긴 시간을 소요했다. 기차도 없던 시절이었고, 시베리아엔 마차가 다닐만한 길이 없었다. 여름에 타이가 지대의 땅은 스폰지처럼 질퍽하고 겨울엔 꽁꽁 얼어붙었다. 길은 강밖에 없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갔고, 강과 강 사이 육지 구간에서는 배와 짐을 끌고 지고 이동했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무시무시하게 추웠다. 겨울철엔 캠프에서 꼼짝 않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람만 가는 게 아니었다. 배를 만들 장비, 몇 년을 먹을 식량을 들고 가야했다. 처음 떠날 때 마차가 33대나 동원되었다. 그에 앞서 230년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 갈 때엔 배에 짐을 잔뜩 싣고 풍랑에 몸을 맡기면 되었다. 두달간 고생하고 그들은 미지의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그에 비해 베링은 오호츠크까지 육로로 가야 했다. 당시 러시아로선 해양 능력에 태평양까지 이르지 못했다. 겨우 발트해 출구를 확보한 상태였다.

 

토볼스크에서 캄차카까지의 지도 /위키피디아
토볼스크에서 캄차카까지의 지도 /위키피디아

 

316일 그들은 시베리아의 입구 토볼스크에 도착했다. 여행거리는 2,820km. 베링은 토볼스크 보예보다(총독)에게 차르의 칙령을 들이밀고 여행비용과 물자 제공을 요구했다. 권력 이양기였다. 표트르대제가 죽은후 명령계통이 뒤틀려 있었다. 베링의 요구는 점점 불어났다. 처음엔 24개조를 지원해달라고 했다가 54개조를 충당해달라고 요구했다. 오호츠그에서 배를 수리하고 건조할 기술자로 목수 60명과 대장장이 7명을 구해달라고도 했다. 토볼스크 총독 입장에서 베링이 달라는 대로 다 주면 그곳은 거덜이 날 지경이다. 칙령을 내린 차르도 죽었으니, 총독은 차일피일하며 집행을 늦췄다.

토볼스크 총독은 39개 조를 지원하고, 목수와 대장장이는 절반만 먼저 지원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베링은 시간을 무한정 끌수 없어 총독과 타협하고 514일 토볼스크를 출발했다.

원정대는 530일 수르구트, 6월말 마코프스크를 거쳐 812일 예니세이스크에 도착했다. 이제 한달 후면 강물이 얼어붙는다. 그들은 서둘렀다. 926일 그들은 예니세이강 상류 일림스크에 도착했다. 3일후 강물이 얼어붙었다. 그들은 육로로 130km 더 동쪽으로 이동해 레나강 상류 우스트구트(Ust-Kut)에 겨울 캠프를 쳤다. 그들은 그곳에서 첫 번째 겨울을 보냈다. 베링은 겨울 동안에 이르쿠츠크를 방문해 태평양 탐사에 관한 정보와 조언을 구했다.

 

1726년 강물이 녹자 그들은 재빨리 레나강 하류를 따라 내려가 6월에 야쿠츠크에 도착했다. 야쿠츠크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그곳 총독은 거의 독립왕국을 이끌다시피 했다.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한 곳에 총독은 칙사처럼 구는 베링 일행이 못마땅해 했다. 베링은 겨울이 오기 전에 오호츠크에 도착해야 했다. 이곳에서도 총독은 물자 공급을 질질 끌었다. 베링은 차르를 앞세워 협박했으나 총독은 요지부동이었다. 베링은 우선 스팡베르그를 오호츠크로 먼저 보내 배를 건조하도록 했다. 스팡베르그는 77209명의 대원을 이끌고 야쿠츠크를 출발했다. 727일 표드르 코즐로프(Fyodor Kozlov) 등 조선공들이 스팡베르그보다 먼저 오호츠크에 도착해 기존의 배 보스트크(Vostok)호를 수리하고, 포르투나(Fortuna)호를 신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베링은 총독과 다투다가 뒤늦게 816일에 야쿠츠크를 출발했다. 그는 치리코프를 야쿠츠크에 남겨두었다.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에 유럽에서 도착하려면 내년봄까지 기다려야 했다.

 

베링 일행이 이동한 시베리아 육로 /위키피디아
베링 일행이 이동한 시베리아 육로 /위키피디아

 

야쿠츠크에서 오호츠크해 사이에는 험준하기로 유명한 콜리마 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콜리마산에는 악마가 산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험하고 특히 겨울엔 위험했다. (스탈린 시기에 1932~1953년까지 콜리마 대로를 건설했는데, 수십만명의 죄수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되어 죽어 나갔다. 후세 사람들은 이 도로를 뼈의 도로라고 불렀다.)

숲 지대와 강을 지나면서 많은 사람과 말이 죽어 나갔다. 베링이 이끌고 간 팀에서도 사망자가 46명이나 나왔다. 온갖 고생을 해서 베링은 10월초에 오호츠크에 도착했다.

하지만 먼저 떠낸 스팡베르그는 그곳에 없었다. 길을 잃은 것이다. 스팡베르그는 중요한 물자를 싣고 떠났기 때문에 짐이 무거웠다. 그 팀은 하루에 1.6km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가야할 거리는 1,102km였다. 강이 얼어붙자 그들은 썰매를 만들어 끌고 갔다. 눈보라가 치고, 눈이 허리까지 쌓였다.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들은 죽은 말로 연명을 해가며 콜리마 산맥을 넘었다. 해를 넘겨 172716일 스팡베르그와 또다른 대원 2명이 오호츠크에 도착했고, 열흘후 60명의 대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겨울은 오호츠크해 날씨로는 최악이었다고 한다.

 

오호츠크에 도착한 그들은 우선 먹을 것이 떨어졌다. 그들은 현지 부족의 식량을 빼앗았다. 야삭(세금)이란 명분을 내걸었지만 약탈 그 자체였다. 가뜩이나 물산이 부족한 동토의 지역에 이방인들이 몰려와 먹거리를 빼앗아 가니, 그들은 그해 겨울 아사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앞서 도착한 조선공들은 배를 수리하거나 신조해 두척의 배를 마련했다.

그들은 야쿠츠크에 남은 치리코프가 돌아올 것을 기다렸다. 겨울이 지나고 17276월 치리코프는 27톤의 식량을 운반하고, 오호츠크에 도착했다. 대원의 피해도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표트르 대제의 명령을 이행할 일만 남았다. 베링과 스팡베르그, 치리코프는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떨어져 있는지, 붙어 있는지를 탐사하는 막중한 임무 수행에 착수했다.

 


<참고자료>

Wikipeida, First Kamchatka expedition

Wikipeida, Vitus B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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