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링 오디세이④…세계 최대의 북방대원정
베링 오디세이④…세계 최대의 북방대원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8.14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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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영토 확장 위해 일으킨 대역사…3천명이 시베리아로 행군

 

비투스 베링의 1차 캄차카 원정(1725~1730)은 러시아인들에게 극동시베리아와 그 너머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또 캄차카에서 남쪽으로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해로가 있을 것이란 예상도 나왔다.

여제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재위 1730~1740)는 통이 큰 통치자였다. 그녀는 시베리아를 개척하고 아메리카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잘난척 하는 서유럽 국가들의 콧대를 꺾어주고 싶었다. 안나의 이런 야심은 표트르 대제의 유업을 이어받아 제국의 동부 국경을 팽창시키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여제는 17324월 새로운 대원정을 준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총대장은 비투스 베링에게 맡기고, 사업주체는 해군, 후원기관으로 러시아과학아카데미를 지정했다.

원정팀의 목표는 방대했다. 북극해를 돌아 일본, 중국으로 가는 북방항로를 개척하는 일, 북아메리카를 발견하는 일, 시베리아의 동식물과 광물자원을 연구하는 일 등이 포함되었다.

원정대는 크게 3개 팀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베링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항로 개척팀이고, 둘째는 마르틴 스팡베르그를 대장으로 하는 일본 항로개척팀, 세 번째는 시베리아 연구팀이었다.

이 원정은 규모나 재정 면에서 세계최대의 탐사였다. 여제는 이 사업에 러시아의 국력을 총동원했다. 사업은 1733년부터 1743년까지 10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동원 인력은 짐꾼까지 합쳐 3,000명에 이르렀다. 총사업비는 150만 루불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1724년 러시아 세입의 6분의1에 해당하는 어머어마한 규모였다.

원정대의 핵심 목표는 뭐니뭐니 해도 북아메리카 탐사였다. 새로운 영토에 대한 차르의 욕심이 숨겨진 국책사업이었다. 아메라카 대륙엔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이 무주지 선점의 원칙에 따라 깃발만 꽂고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북쪽 추운 지방에는 아직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곳을 러시아가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덤으로 일본과 중국, 나아가 스페인 식민지인 필리핀까지 가는 바닷길도 찾고, 시베리아에서 금이 있는지, 좋은 모피를 가진 동물들이 있는지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원정을 북방대원정(Great Northern Expedition)이라고 명명한다. 또는 2차 캄차카원정이라고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캄차카원정은 북방대원정의 부분이다.

 

1754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가 그린 북미 지도 /위키피디아
1754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가 그린 북미 지도 /위키피디아

 

북방대원정은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처음엔 500명이 참가하는 것으로 예상했으나, 귀족들이 가족을 동반하고 짐꾼까지 데려가면서 수가 불어났다. 베링도 부인과 두 아들을 동참하게 했다.

대집단이 이동하게 되자 현지에서 식량이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다. 베링은 1차 원정 때에 식량 부족으로 고생한 경험을 되살려 큰 배에 식량과 물자를 실어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 캄차카에 실어 나르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 방안은 조정에서 거부되었다. 하는수 없이 배를 건조할 장비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마차에 싣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팀별로 따로 출발했다. 17332월 스팡베르그가 선발대로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났고, 이어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418, 베링은 429일 각각 출발했다. 과학자팀은 8월에 출발했다. 집결지는 토볼스크였다. 당시 토볼스크는 조그마한 소읍에 불과했는데, 엄청난 인원이 도착하는 바람에 토볼스크의 물자가 거덜났다. 그들은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자 이르쿠츠크를 향해 출발했다.

시베리아를 낭만적으로 보던 사람들은 행군이 시작되면서부터 피로감을 느껴 되돌아갈 생각부터 했다. 도중에 많은 사람이 돌아갔다. 17348월 베링은 야쿠츠크에 도착해 뒤에 따라오는 대열을 기다리며 겨울을 보냈다.

야쿠츠크에서 베링은 레나강을 따라 내려가 북극해에 도달한 다음 동쪽으로 항해해 베링해를 돌아 캄차카에 이르는 이른바 북극항로(northern sea route)를 개척할 준비를 했다. 베링은 스팡베르그를 오호츠크에 먼저 보내 다음 원정을 준비하게 했다.

야쿠츠크는 레나강에 마련된 극동시베리아의 거점이었다. 베링은 그곳에서 두 척의 배를 구해 레나강을 따라 북쪽으로 가게 했다. 하지만 야쿠츠크는 시베리아에서도 가장 추운 곳이고 여름엔 높지로 변해 버렸다. 북극항로팀은 얼마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베링은 하는수 없이 1차 원정때 지나갔던 콜리마산맥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북극항로 /위키피디아
북극항로 /위키피디아

 

야쿠츠크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1737년 여름에야 콜리마 산맥을 넘었다. 콜리마는 1차때와 마찬기자로 여행자들에겐 고통을 주었다. 베링의 본대는 그해 말에 오호츠크에 도착해 겨울을 보냈다. 출발한지 5년의 세월이 흘렀다.

베링의 원정대는 캄차카에 영구적인 항구를 만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조선소도 짖고 창고도 만들었다. 먼저 도착한 스팡베르그는 배를 지을 준비를 해놓았다. 1차 원정 때 사용한 가브리엘(Gabriel)호를 수리하고, 2척을 신조했다. 마카엘(Michael)과 나데즈다(Nadezhda)호였다.

시간이 지체되면서 재원도 고갈되었다. 조정은 예산이 많이 들어갔으나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좋은 시절은 지나갔다. 30만 루불의 추가비용을 청구힜더니 12,000 루블이 책정되었다. 베링은 봉급을 절반을 깎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물을 내기 위해 스팡베르그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17386월 그는 준비된 배를 이끌고 쿠릴열도로 향했다. 그해 스팡베르그는 쿠릴 열도를 거쳐 일본 본섬인 혼슈(本州)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쿠릴열도에는 그의 이름을 따 스팡베르그 섬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시코탄(色丹)이라 부른다. 스팡베르그는 이 탐사에서 쿠릴열도의 30개 섬을 발견했다.

 

돈이 떨어지면 싸움이 생긴다. 부관 스팡베르그와 치리코프가 베링에게 대들었는데, 치리코프는 부당하게 억압적이라고 항의했고, 스팡베르그는 베링이 너무 유약하다고 비난했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선 대원정을 중단하거나 베링을 교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740년까지 3년간 베링은 안팎에서 몰아치는 압박을 이겨내고 줄어든 예산으로 배를 만들어야 했다.

17408월경에 대원정의 핵심사업인 북미탐사의 준비가 끝나갔다. 베링의 나이는 59. 그는 마지막 원정에 나서기 위해 마음을 다졌다. 7년간 시베리아를 함께 여행하고 오호츠크에서 동고동락했던 아내 안나와 두 아들은 페테르스부르크로 돌려 보냈다. 그게 그의 가족과 마지막 이별이었다.

페테르스부르크의 해군본부에서 메신저가 왔다. 수도에서는 그동안의 진척 사항을 보고하라고 했다. 베링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북아메리카 탐사에 나섰다. 그의 마지막 원정이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Great Northern Expedition

Wikipedia, Vitus Bering

Wikipedia, Martin Spang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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