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링 오디세이⑤…알래스카 탐험
베링 오디세이⑤…알래스카 탐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8.15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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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남해안, 알류산 열도 발견…표류 끝에 괴혈병으로 사망

 

러시아의 북방대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은 북미대륙 발견이었다. 그런데 멀고먼 시베리아를 건너오는데 5, 오호츠크 현지에서 배를 건조하는데 2년이 걸렸다. 그는 이번 탐사가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이도 60살에 가까워 지는데다 시베리아 생활만 벌써 10년이 넘었다. 선박 건조가 마무리되면서 17408월 태평양 연안까지 따라왔던 아내와 두 아들을 페테르스부르크로 돌려보냈다.

새로 지은 두척의 배는 표트르호(Sviatoi Piotr)와 파벨호(Sviatoi Pavel)였다. 표트르호는 베링이 선장을 맡고, 파벨호는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맡기로 했다. 그들은 두척의 신조선과 기존의 베 나데즈다를 이끌고 오호츠크를 떠나 캄차카로 갔다. 9월 중순 캄차카에 도착했는데 나데즈다호는 모래뻘에 좌초한데다 그후 강풍을 맞아 부서져 버렸다. 그들은 새로이 정박할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아바차만(Avacha Bay)이었다. 그곳에 창고와 거주지, 등대를 건설하고 겨울을 보냈는데, 지금 캄차카 주도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Petropavlovsk). 두 배의 이름을 붙여 지은 도시다.

 

비투스 베링의 탐험행로 /The Alaska Native Studies Blog
비투스 베링의 탐험행로 /The Alaska Native Studies Blog

 

해를 넘겨 174164일 베링과 치리코프는 두 배에 나눠 타고 어딘가에 있을 아메리카대륙을 찾아 나섰다. 그들의 항로는 베링해를 남쪽으로 활처럼 도는 코스였다. 두배는 서로 보이는 거리에서 나란히 이동했다. 620일 강풍이 몰아쳤다. 두 배는 방향을 잃고 중심을 잡기에 급급했다. 그러는 사이에 두 배는 서로 멀어졌고, 이윽고 영원히 헤어졌다. 두 배의 항로를 보면 치리코프가 탄 파벨호는 비교적 빨리 안정을 찾아 정상궤도를 찾은 반면에 베링의 표트르호는 한바퀴 돌아 제 방향을 찾긴 했는데, 파벨호에 비해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표트르호는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9월초에 알래스카만에 도달했다. 930일 베링은 선상에서 세인트 엘리어스 산(Mount Saint Elias)을 보았다. 해발 5,489m인 이 산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10월초 베링은 드디어 병이 났다. 괴혈병이었다. 비타민C가 부족해서 생기는 병인데, 피부가 건조해져 피하출혈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베링은 캄차카로 회항할 것을 명령하고 지휘권을 항해사(Sven Waxel)에게 넘겼다. 베링은 1차 탐험에서 보지 못했던 알래스카의 남부 해안을 목격했고, 코디악 섬(Kodiak Island)도 발견했다. 그리고 물을 구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카약섬(Kayak Island) 어딘가에 내렸다. 베링은 물론 다른 선원들도 괴혈병에 시달렸다. 그런 와중에 표트르호는 다시 풍랑을 만났다.

표트르호의 항로를 보면 알래스카 남해안에서 표류를 시작한 것을 알수 있다. 그런 와중에 대다수 선원들이 병자가 되어 키를 정상적으로 잡을수 있는 사람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1741년 비투스 베링이 알류산 열도에서 난파한 그림 /위키피디아
1741년 비투스 베링이 알류산 열도에서 난파하다(그림) /위키피디아

 

한편 치리코프가 탄 파벨호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운항해 7월말에 알래스카 남단에 있는 오늘날의 알렉산더 열도(Aleksander Archipelago)를 발견했다. 치리코프는 그곳에서 회항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알루산 열도를 보았고, 원주민들은 카약을 타고 러시아인들의 항해를 구경했다. 108일 치리코프의 파벨호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항으로 돌아와 베링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치리코프는 러시아 조정이 의도한 북아메리카 발견을 달성하고 성공적으로 귀환한 것이다.

이에 비해 베링을 태운 표트르호는 심하게 표류하다가 114일 뭍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곳에 배를 대고 겨울을 날 작정이었다. 하지만 배가 해안에 접근하는 순간에 폭풍이 불어닥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표트르호 선원들은 그곳이 어딘지 몰랐다. 후에 확인하기를 알류산 열도가 끝나고 캄차카반도와 만나는 코만도 열도(Commander Islands)의 어딘가였다. 베링의 괴혈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17411219일 비투스 베링은 그 곳에서 사망했다. 17252월 상트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지 16년만이다. 도중에 페테르스부르크에 들른 3년을 빼면 10년 이상 시베리아의 찬바람을 맞으며 살다가 죽은 것이다.

 

한편, 베링과 함께 표착한 선원들은 그곳이 섬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들은 추위와 괴혈병, 북극여우의 공격에 시달리며 하나씩 죽어 나갔다. 섬에 도착했을 때 74명이던 대원들 가운데 31명이 사망했다.

생존자들은 바다사자를 식량으로 삼아 생명을 부지했다. 해가 바뀌어 봄이 오자, 살아남은 43명은 난파선의 파편을 주워 모아 배를 만들고, 그것을 타고 캄차카로 돌아갔다. 난파한지 9개월만인 1742813일에 그들은 출발지였던 페트로파블로스키 항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베링이 죽은 그 섬을 베링 섬(Bering Island)라고 명명했다.

베링섬의 베링 무덤 /위키피디아
베링섬의 베링 무덤 /위키피디아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이 독일 생물학자 게오르그 슈텔러(Georg Wilhelm Steller). 그는 표트르호에 승선해 바다사자를 보고 캄차카와 다른 대륙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는 항해 도중에 새로운 종의 동식물을 발견해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슈텔러 바다사자(Steller sea lion), 슈텔러 오리(Steller's eider), 슈텔라 제이(Steller's jay) 등이다. 그는 베링섬에서 많은 동료들이 괴혈병으로 죽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괴혈병을 치료하는 식물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돌아온 후 슈텔러는 2년간 캄차카반도 탐사에 참여했다. 그는 감정적으로 원주민들을 동정했다. 그는 원주민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페테르스부르크로 소환되었으며, 다시 이르쿠츠크 청문회에 불려가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석방이 되어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가던 중에 열병을 앓게 되어 1746년에 튜멘에서 사망했다.

그가 캄차카와 알래스카에서 채집하고 발견한 동식물 연구자료는 후에 영국 쿡 선장의 태평양 탐사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비투스 베링의 영광은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 북방대원정의 목표였던 북미대륙 발견의 공로는 부관이었던 치리코프가 차지했다. 최초의 알래스카 발견은 1732년대 베링해를 건너 반대편 육지를 본 미하일 그보즈데프(Mikhail Gvozdev)에게 돌아갔다. 최초의 베링해협 탐험 기록도 그보다 80년전에 표류로 인해 어쩌다 해협을 건넌 것으로 확인된 세묜 데즈네프에게 돌려졌다. 하지만 그는 곳곳에 이름을 남겼다. 베링해, 베링섬, 베링해협, 베링빙하, 베링육로(베링기아)가 그것이다.

크리스토포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카리브해에서 총독으로 군림했다. 그에 비해 베링은 죽음으로 그의 역할을 끝냈다. 다만 그의 성과는 러시아가 북아메리카의 북부, 알래스카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고 100여년간 지배하는데 초석을 제공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Vitus Bering

Wikipedia, Georg Wilhelm Steller

The Alaska Native Studies Blog, Tlingit Encounters with the Second Kamchatka Exp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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