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마의 해적공화국…영국 해군에 붕괴
바하마의 해적공화국…영국 해군에 붕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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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1718년 11년간 존재…우즈 로저스가 진압, 카리브해 해적 소멸

 

케이먼 제도, 버진 아일랜드, 바하마, 파나마, 도미니카, 네비스, 앙길라, 벨리즈.

카리브 해의 섬나라 또는 연안국들은 조세회피처(tax haven)로 유명하다. 불법 정치자금이나, 기업의 탈세자금, 범죄자들이 약탈한 돈이 이 곳으로 몰려든다. 검은 돈은 세금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당국의 감시와 조사를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카리브해 조세회피처들은 약탈적 자본주의가 형성한 지하자금의 은닉처가 되고 있다.

300년전, 이 곳은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마음껏 남의 물건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일수 있는 곳이다. 무법지대였다. 사람과 자본은 권력을 피하고 싶어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는 것 같다.

카리브해에 한때 해적공화국(Republic of Pirates)이 존재했다. 1706년부터 1718년까지 11년간 실재했으며, 위치는 현재 바하마의 수도 나소(Nassau)가 위치한 뉴프로비던스(New Providence) 섬이다.

바하마의 해적공화국에는 헌법이 없었다. 히지만 깃발은 만들었다. 검은 바탕에 해골과 두 개의 칼을 교차시킨 것이 그들의 깃발이었다. 영화나 만화에 많이 나오는 해적선 깃발이 이들의 깃발이었다.

공식적으로 국가나 정부라고 할수 없다. 해적의 국적은 영국인인데, 어느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치외법권의 무법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바하마 제도 /위키피디아
바하마 제도 /위키피디아

 

나소에 해적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696년 사략선 선장 헨리 에브리(Henry Every)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그는 인도 항로에서 약탈한 물건을 싣고 바하마로 갔다. 그는 바하마 총독 니콜라스 트로티(Nicholas Trott)에게 엄청난 뇌물을 먹였다. 바하마 총독은 에브리 소유의 배 팬시(Fancy) 호에다 금과 은, 코끼리 상아 50, 화약 100 배럴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뇌물을 받고 나소에 해적 소굴을 인정해 주었다. 그후 총독이 수시로 바뀌면서 탄압에 나섰지만, 그때마다 뇌물을 주어 소굴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후 카리브해에 흩어져 있던 해적들과 유럽에서 해적을 꿈꾸며 온 인원들이 나소에 몰려 들었다.

 

해적공화국 기 /위키피디아
해적공화국 기 /위키피디아

 

1701년 유럽에선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펠리페 5세가 스페인 국왕에 오르면서 프랑스-스페인이 연합해 영국의 해외영토를 침공했다. 그중 가장 만만한 것이 카리브해였다. 1703년과 1706년 두차례에 걸쳐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바하마의 나소(Nassau)를 공격했다. 영국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바하마 제도의 영국인과 군대는 일단 철수했다.

이 공백지대를 영국 해적들이 메웠다. 1706년 대서양과 카리브해를 떠돌던 영국 해적들이 바하마를 공격해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를 쫓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 해적 공화국’(Republic of Pirates)을 수립했다. 나소를 수도로 삼았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섬들을 되찾으려고 포격을 가했지만, 영국 해적들은 막아냈다. 영국 정부는 자신의 해군력으로 바하마를 지킬수 없으므로, 해적들의 전투력에 의존했다.

1713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나면서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과 선원들이 실업자가 되었다. 그들은 해적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섬으로 찾아왔다.

이때 나소에는 일반 정착민보다 해적들이 더 많았다. 인근 버뮤다의 영국 총독은 나소에 해적 1,000명이 집결해 있다고 말했다. 당시 나소에 살던 일반인이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완전히 해적들에 의해 점거된 상태였다.

해적공화국은 뚜렷하게 국가수반을 옹립한 정부조직이 아니었다. 힘있고 인기있는 해적두목들이 서로 패를 나누어 할거하고 있었다. 당시 나소의 해적 세계는 벤자민 호니골드(Benjamin Hornigold)와 헨리 제닝스(Henry Jennings)의 두 파로 나뉘어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호니골드 파에겐 악명 높은 에드워드 티치(Edward Teach), 샘 벨러미(Sam Bellamy), 스티드 보넷(Stede Bonnet) 등이, 제닝스 쪽에는 찰스 네인(Charles Vane) 잭 래컴(Jack Rackham), 여자 해적 앤 보니(Anne Bonny)와 메리 리드(Mary Read)가 각각 가담했다.

그들은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먹잇감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플라잉 갱’(Flying Gang)이라는 연합조직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 갱단이었다. 영국령 자메이카의 포트 로열(Port Royal)을 공격해 파괴하고 스페인 보물선 인양작업을 급습해 금을 빼앗았다. 그들은 유명세를 탔다.

 

악명 높은 해적 ‘검은수염’ 티치의 전투 그림 /위키피디아
악명 높은 해적 ‘검은수염’ 티치의 전투 그림 /위키피디아

 

첫 번째 두목은 검은 수염’(Blackbeard)이란 별명의 에드워드 티치가 호니골드 파의 지지로 두령(Magistrate)이란 지위에 올랐다. 티치는 공화국을 이끌면서 나름 해적 규정을 만들었다.

두 번째 두목은 토머스 배로(Thomas Barrow)였다. 이 자는 스스로 프로비던스 총독에 올라 2의 마다가스카르를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동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섬은 유럽 해적들의 낙원이라 불렸다. 그가 제2의 마다가스카르를 만들겠다고 하자 자메이카에 있던 해적 500~600명이 작은 범선을 타고 와 참여했다.

배로는 카리브해의 프랑스와 스페인 점령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영국을 위해 공격을 한 것이 아니라,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 영국은 처음에 가만 있었다. 해적들이 영국령을 공격해올 때까지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배로는 호니골드와 손잡고 카리브해 주변에 영국인 정착지도 약탈했다. 결국엔 해적들이 영국 해군의 구축함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드디어 영국정부가 해적 소탕에 나섰다. 영국정부로선 더 이상 해적이 필요 없게 되었다. 스페인, 영국과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이젠 해적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신세가 되었다. 1717년 영국 조지 1세는 모든 해적들에게 1년 이내에 항복하면 사면하겠다는 직령을 내리고, 우즈 로저스(Woodes Rogers)를 바하마 총독에 임명했다.

나소의 우즈 로저스 상 /위키피디아
나소의 우즈 로저스 상 /위키피디아

 

로저스도 해적질을 한 사략선 선장 출신이었다. 1708년 로저스는 영국에서 투자자금을 모아 배 2척을 구하고 영국 정부로부터 사략허가증을 얻었다. 목표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에서 영국의 적이 된 프랑스와 스페인 배였다.

그는 칠레 연안을 항해하다가 후안 페리난데스 제도의 한 무인도에서 44개월이나 홀로 산 알렉산더 셀커크(Alexander Selkirk)라는 스코틀랜드인을 구출했다. 셀커크는 선원 출신으로 선장과 싸우다 섬에 버려졌는데, 야생염소와 가재 등을 잡아먹으며 직접 집을 짓고 옷을 만들어 입으면서 살았다. 그의 생존기는 후에 대니얼 디포(Daniel Defoe)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의 모델이 되었다.

어쨌든 로저스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돌아다니며 약탈질을 해서 1711년 영국에 돌아왔는데, 그는 뺏아온 보물과 모험기로 인해 일약 스타가 되었다.

영국 정부는 로저스를 앞세웠다. 해적을 앞세워 해적을 소탕하는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이다. 로저스도 해적 두목을 앞세워 해적을 섬멸하는 이이제의 방식을 썼다.

로저스는 17187척의 전함을 이끌고 나소에 도착했다. 그는 해적들에게 항복을 하면 국왕의 사면이 있을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처형하겠다고 선포했다.

해적들은 모여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항복하자는 자와 도망가겠다는 자로 엇갈렸다.

로저스에게 가장 먼저 협조한 해적은 호니골드였다. 호니골드는 부하 해적들을 이끌고 로저스에 항복했다. 로저스는 호니골드를 앞세웠다. 호니골드는 한때 자신의 부하들을 찾아가 항복을 설득했다.

찰스 베인과 검은 수염 티치는 부하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호니골드는 탈주자들이 숨어 있을 곳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찾아내 체포했다. 17181212일 체포된 해적 9명이 나소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바하마는 영국 정부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해적공화국은 11년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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