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지방제도②…삭주(朔州), 맥국의 땅
신라의 지방제도②…삭주(朔州), 맥국의 땅
  • 아틀라스
  • 승인 2019.03.1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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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때 거칠부 등이 고구려를 침공해 얻은 땅…경북 영주에서 함경도 안변까지

 

통일신라의 삭주(朔州)는 고구려 땅으로, 지금의 강원도 영서 지방에 해당한다. 여기에 경상북도 영주(급산군, 나령군)과 충청북도 제천(나제군)이 포함된다. 게다가 북한 강원도지역이 포함되고, 함경남도 안변과 문천이 포함된다. 하지만 강원도 영서 지방 가운데 정선, 평창군은 명주에 속했다. 삭주는 정확하게 지금의 영서지방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이 주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삼국사기에 그 단초가 드러난다.

진흥왕 12(551),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해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이 짤막한 한 문장이 신라가 삭주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삭주는 12개 군으로 되어 있다. 경상북도 급산군, 나령군을 제외하고 나머지 10개군이 이때 신라에 의해 점령되어 영토에 포함된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이때 거칠부 등이 점령한 고구려의 군은 가평군(가평), 양록군(양구, 인제), 낭천군(화천), 대양군(화천), 익성군(김화, 평강), 기성군(양구), 연성군(북한 강원도 회양), 삭정군(함경남도 안변), 정천군(함경남도 문천)이다.

삭주의 치소는 춘주(춘천)이었고, 3개현을 주도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원주를 소경(小京)으로 삼았고, 12개 군으로 형성되었다.

 

서기 551년 한해 동안에 신라는 과거 신라의 영토보다 넓은 고구려 땅을 지역을 빼앗는다. 놀라운 일이다. 소백산맥에 갇혀 있던 조그마한 소국이 어느날 갑자기 강력한 고구려를 누르고 한해만에 이 거대한 땅을 확보하게 되었을까.

한강 유역을 놓고 신라, 백제, 고구려가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지만, 적어도 강원도 영서지방의 삭주에 대해서는 신라가 지배권을 놓치지 않는다. 배후지를 든든하게 해 놓았기 때문에 신라는 한반도 중앙을 지배하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확보한 것이다.

 

그래픽=김인영
그래픽=김인영

 

 

이때 거칠부 등은 강원도와 함경도 경계에 있는 철령(鐵嶺)을 넘는다.

조선 중기 문신 이항복은 귀양살이를 가다가 철령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며 이런 시조를 읊었다.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 원루를 비 삼아 띄우다가/ 임 계신 구중 심처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높이 685m. 고개의 북쪽을 관북지방, 동쪽을 관동지방이라고 한다. 1914년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경원선이 부설되기 이전에는 관북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서울에서 안변, 원산, 함흥을 잇는 길목이다. 이 길목만 지키면 1만 대군도 덤비지 못한다고 하는 군사적 요충지다.

 

거칠부가 이끄는 신라군은 소백산맥의 죽령에서 6백리 길을 북상해 구름이 쉬어넘는다는 철령까지 진군했다.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진흥왕의 북진(北進) 명령을 받은 장군은 여덟명. 거칠부를 대장군으로 하고,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출발지는 한해 전에 이사부를 대장군으로 해서 뺏은 충북 적성이었다. 거칠부를 포함해 여덟 신라장군은 남한강에서 출발해 북한강을 넘어 북으로, 북으로 공격해갔다. 그들은 소백산맥 죽령에서 지금은 북한 땅인 철령(高峴)까지 10개 군은 빼앗았다.

이 해 신라와 고구려의 전투는 신라의 정복 전쟁 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싸움이었다. 이때 신라가 확보한 새 영토의 면적은 진흥왕이 즉위할 당시의 영토에 버금간다. 이 영토는 통일신라 시대 삭주, 고려시대 삭방도로 알려진 강원도 영서지방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이 전투는 백제와 공조로 이뤄졌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조에 백제가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가 승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표현이 있다. 같은해 기록인 일본서기 흠명(欽明) 12년에 백제 성명왕(성왕)이 친히 자국과 2(신라와 가야)의 병을 거느리고 한성(漢城)을 되찾았다. 또 진군해 평양을 쳐 모두 6개 군()의 땅을 회복했다고 했다.

 

이때 고구려는 양면 협공을 당하고 있었다. 고구려 양원왕 7년이었다. 돌궐(突厥)이 요동의 거점인 신성을 포위, 공격하자, 고구려는 반격을 가했다. 돌궐이 고구려의 저항으로 실패하자, 다시 백암성을 공격했다. 고구려 고흘(高紇) 장군이 병사 1만으로 돌궐과 치열한 싸움을 펼치는 사이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일본서기엔 가야도 참여했다고 함)이 남쪽에서 침공한 것이다. 고구려는 북쪽에서 침략해온 돌궐군과 싸워 1천명의 머리를 베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남쪽 경계를 비우는 사이에 백제에게 6개군, 신라에게 10개군을 빼앗겼다. 고구려는 당시엔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수행할 역량이 없었던 것 같다. 돌궐이 대규모 공세를 펼치자 전력을 북쪽에 쏟아부었고, 남쪽에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백제와 신라가 공격한 것이다.

 

이때 거칠부가 뺏은 땅이 고대사에 맥국(貊國)으로 알려진 곳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삭주(朔州)옛날 맥()의 땅이라고 썼다.

맥국은 춘천을 중심으로 화천, 양구 일대를 통치하던 고대국가였으며, 횡성, 평창등지에서도 맥국의 전설이 남아 있는 점에서 영서지방을 아우르는 연맹체로 파악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맥국은 춘천을 중심으로 강원도 영서지방에 위치해 있었다. 사서에서 맥국에 관한 기록은 손에 꼽힐 정도다. 하지만 맥국의 위치에 대해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언급하고 있으므로, 실재하고 있던 나라임은 분명하다.

춘주(春州)는 예전의 우수주(牛首州)인데 옛날의 맥국(貊國)이다.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라고도 했다.” (삼국유사 마한편)

가탐(賈耽)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고구려의 동남쪽, ()의 서쪽, 옛날 맥()의 땅으로써, 대략 지금 신라 북쪽 삭주다라고 써있다. 선덕왕 61(서기 637)에 우수주(牛首州)로 만들어 군주(軍主)를 두었고, 경덕왕이 삭주로 개칭했다. 지금의 춘주(春州).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

 

맥국은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동한 종족이다. 맥족은 요하 하류에 세력을 형성하다가 고구려와 부여에 의해 밀려나 한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백제 건국기엔 맥족이 춘천을 중심으로 영서지방에 부락을 만들고 부족연맹체를 형성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맥족에 관해,

()은 동이(東夷)의 옛나라로 중국의 동북쪽에 있고, ()과 가까웠으므로 북맥(北貉)이라고 했다. 그 땅에서는 오곡이 나지 않고 오직 기장만 생산됐다. 부여와 고구려가 함께 일어나자 그 부락이 동으로 옮겨가 예국의 서쪽, 지금 춘천부에 살면서 고구려에 복속했다. 산이 깊고 험해 다투지 않는 지역이 됐다.”고 했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고구려의 남쪽에 조선예맥이 있다. (중략)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고구려가 나라를 (소수맥이) 세울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이 소수(小水)를 의지해 나라를 세웠기로 소수맥이라 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貊弓)이라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썼다.

 

맥족은 강을 중심으로 주거를 형성했던 것 같다. 요하, 소수 등 강에 의지해 살던 맥족이 남으로 쫒겨오면서 북한강이 흐르는 춘천에 도읍을 정했다. 춘천에서 발굴되는 마을 유적지들이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든 충적지에 만들어졌다. 맥궁이라는 활이 중국에도 알려질 정도로 유명하고, 삼국사기엔 맥국 우두머리가 새와 짐승을 잡아 신라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어 맥족이 수럽에 능한 종족임을 알려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맥국에 대한 기록은 신라 유리이사금 때 2, 백제 책계왕때 1회 나온다. 예국이나 옥저처럼 대군장을 두지 않고, 읍락마다 부족장을 두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 기사에선 맥족의 부족장을 거수(渠帥)라는 표현이 있다.

신라 유리이사금 17(40) 9,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해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했다. 맥국(貊國)의 거수(渠帥)가 병사를 동원해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해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유리 19(42) 8, 맥국의 거수가 사냥을 해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이상 삼국사기 신라본기)

백제 책계왕 13(298) 9, ()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해 침범했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 기사에서 유리이사금때 맥국이 신라를 도와 싸웠다는 곡하라는 지명에 대해 강릉이라는 설도 있지만, 강릉 이외의 강원도 어느 지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나라의 직할령인 낙랑군이 서기 30년 동부도위를 폐하고 7개의 부족장을 현후(縣侯)로 봉해 자치권을 준다. 이때 동부도위의 치소가 있던 불내현(함남 안변)과 화려(함남 영흥)의 예족들이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공했고, 맥국의 우두머리가 부족군을 이끌고 강원도 방면으로 가서 신라를 도왔다는 기사다.

맥국의 본거지가 춘천으로 알려져 있는데, 춘천의 맥족이 강릉까지 군사를 동원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유리왕때 신라를 도와 예국과 싸운 맥족은 평창 근처의 부족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그 이유로 평창에서 대관령을 넘으면 곧바로 강릉이고, 평창강 유역에서 적석총을 비롯해 철기시대의 유적,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봉평 지역에서 맥국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太岐王)전설이 남아있다는 점을 들수 있다.

의 기사에서 책계왕때 백제를 침공한 한()나라는 위()의 낙랑군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한나라는 멸망하고, 위촉오의 3국시대였는데 낙랑군은 위()에 소속했으므로, 의 기사에서 한()은 위()의 오기로 보인다. 어쨌든 한사군의 마지막 명맥을 유지하던 낙랑군은 맥족을 동원해 백제를 치고, 책계왕이 전사한다. 낙랑군은 313년에 이땅에서 사라지는데, 이 무렵 낙랑군의 군사력은 고구려의 잦은 침공으로 약해질대로 약했고, 따라서 낙랑군과 연합한 맥국 병사의 전투력이 백제 임금을 죽일 정도로 강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42년에서 298년 사이 250년 이상의 시간대에 삼국사기에선 맥국 또는 맥족에 대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이 기간에 백제의 서북부에서 백제를 괴롭히는 종족이 말갈이다.

삼국사기 본기에 등장하는 말갈과 관련한 기사는 백제본기 30, 신라본기 19회에 이른다. 신라본기에 나오는 말갈 기사는 실직국이 멸망한 후 집중되는데, 동예, 옥저에 이르는 예족과 혼선이 빚어진다. 백제와 충돌하는 말갈은 맥족과 혼동된다. 김부식이 예족과 맥족을 구분하지 않고 말갈이라고 오인해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만주에 있던 숙신계 종족이 한반도 중부로 내려와 예, 맥과 함께 동거했을 수도 있다. 학계에는 여러 가지 설이 나오고 있지만, 어느 것도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실정이다.

어쨌든 말갈은 영동지역에서 신라와 충돌하고, 영서지역에서 백제와 전투를 벌인다. 말갈이나 예, 맥 모두가 고구려에 복속한 북방 동이족이고, 이전에 한반도에 실재했던 종족이 나중에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용광로에 녹아들어 한()민족이 형성됐다고 본다. 우리가 단일민족이라고 자랑하지만, 여러민족과 종족이 전쟁과 문화교류를 거치는 수천년의 역사과정을 통해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화로 통합된 것이며, 지역별로 남아있는 고유의 풍속, 설화 등에서 원래 종족의 옛모습을 어렴풋이 들여다볼 뿐이다.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발신리의 맥국터 기념비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발신리의 맥국터 기념비

 

 

사서에는 맥국에 대한 기록이 드물지만, 춘천을 중심으로 강원도 영서지방에는 지명과 전설로 맥국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18세기 이후 제작된 춘천 고지도엔 맥국허(貊國墟)’, ‘고맥도(古貊都)’, ‘고맥성(古貊城)’, ‘맥국고성(貊國古城)’이라는 표기가 등장한다. 일부 지도엔 지금의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 산기슭에 동그라미를 그려넣고 맥국고도라고 표시하기도 했다.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와 우두동을 에 맥국의 전설이 집중되는 점으로 보아 춘천이 맥국의 중심지이고, 발산리가 맥국의 왕궁터로 파악된다.

신북읍 발산리는 좌측의 북한강 줄기와 우측의 소양강 줄기 사이에 위치한다. 두 물이 만나는 두물머리이고, 우두동은 두 강이 만나 형성된 퇴적층이 우두벌을 조성해 맥국의 치소(治所)로서 지리적 조건을 만들고 있다. 발산리에는 맥국터, 맥둑, 궐터, 왕대산(王臺山), 바리미(발산), 매봉(맥봉), 삼한골 등 맥국과 연관한 지명들이 남아있다.

우두(牛頭) 또는 우수(牛首)소머리를 뜻하며, 북한강 본류와 소양강이 합쳐지는 모습이 소머리 같다고 해서 지어진 명칭이며, 소양강의 명칭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춘천 일대에 대한 유적지 조사가 본격화되면서 맥국에 대한 실체도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맥국 옛터로 알려진 소양강 유역 신북읍 일대와 우두동 일대의 충적지대엔 대규모 마을 유적이 발견됐으며, 화천·양구 일대에서도 청동기 또는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들이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맥국은 성읍국가 형태의 연맹체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우두산에 있는 토성은 청동기 말기 또는 초기 철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맥인들이 조성한 산성으로 추정된다.

 

맥국에 대한 전설은 춘천을 중심으로 횡성, 평창등 영서지방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우두산 맥국 전설:

조선 숙종때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쓴 단군신화 역사책인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쇠머리고장 우수주에 단군의 신하 팽오(彭吳)가 발산리 맥국에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다.

“4300년전 큰 홍수가 나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논반이 물에 잠기고 가축들도 잃게 됐다. 물이 골짜기와 들판에 가득찼는데, 산이 막아서서 물이 빠지지 않았다. 백성들이 산에 올라가 구원을 청했다.

이때 팽오가 단군왕검의 명을 받고 나가서 신통력과 용기로 물길을 뚫었다. 피난갔던 백승들이 돌아와 농토를 재건하고 정착해 안정을 되찾게 됐다. 맥국 사람들은 팽오를 기려 우두주에 통도비를 세웠다. (통도비가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없다. 전설일 뿐이다.)

유포리 아침못 전설

백두산의 천지가 춘천에 옮겨져 아침못(朝天池)와 바리산(鉢山)이 됐다. 발산은 작은 백두산이고, 아침못은 작은 천지이며, 버들개(柳浦里)는 궁전의 장소다.

) 용화산성 전설

맥국의 성지인 용화산(龍華山)의 산성은 맥국 백성과 군사들이 화천군 하남면 남천강의 강돌을 날라 쌓은 산성이다. 지금도 용화산 동북편 능선에 돌로 쌓은 성이 남아있다.

맥뚝 전설

외적이 마적산을 넘어왔지만, 맥뚝에서 지키다가 망했고, 지금은 논두렁이 됐다. 맥뚝은 신북읍 산천리에서 사북면 고탄리까지 이어졌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자취가 거의 허물어졌다.

삼악산 맥국 패퇴전설

맥국 군사들이 적의 침입을 받아 패퇴해 도읍(발산리)을 버리고, 남쪽의 삼악산성(三岳山城)으로 옮겼다. 적군은 삼악산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했다. 산세가 험준하고 산성이 견고했다. 맥의 군사들은 아래를 내려보면서 적에게 활을 쏘고 돌을 굴러 내렸다.

적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꾀를 부렸다. 적은 말 안장을 뗀 빈말을 뛰어놀게 하고 늙고 쇠약한 군사들로 하여금 칼싸움 연습을 하는 것을 보여주어 힘없는 군사임을 믿어 방심하도록 했다.

적은 삼악산 맞은 편에 군사들이 바위위에 빨래를 널어놓고 서쪽에 군대를 매복해 놓았다. 맥군은 안심했고, 적은 그 틈을 타서 군사들을 이동시켜 북쪽 성벽에 사다리를 놓아 성으로 올라갔다. 서문 쪽에서는 방물장수 할머니를 보내 왕비가 좋아하는 패물을 구해왔다고 해서 성문을 열게 하고, 그틈을 타서 매복군을 투입시켰다.

적은 북쪽과 서쪽에서 쳐들어가 삼악산성을 완전히 점령했다. 맥국군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패하고 말았다.

적의 군사들이 빨래를 널었던 곳이 지금 의암(衣岩)이며, 의암호의 지명이 이래서 생겼다.

태기산 전설

맥국의 마지막임금인 태기왕(泰岐王)이 춘천에서 적에게 쫓겨 태기산에 이르러 산성을 쌓고 병마를 양성했다. 태기왕은 삼형제(森炯濟) 장군에게 군사 3백명을 주고 삼형제봉에 진을 치게 하고, 호령(號令)장군에게 군사 5백명으로 호령봉에 진을 치게 해서 대관령을 넘어오는 예국의 침입에 대비했다.

드디어 동북쪽 진부면 도주골(지금 도사리)에서 예군이 쳐들어와 호령장군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태기산으로 진격해왔다. 이 소식을 들은 삼형제장군이 급히 군사를 이끌고 태기산성으로 달려갔지만, 산성은 함락됐다. 태기왕은 간신히 탈출해 피난했다. 태기왕은 피난도중 옥산대(玉散臺: 지금 안흥동)에서 옥새를 잃어버린채 옥류(玉留)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후 멸인(滅人: 지금의 면온)에서 사태를 관망했다. 그러나 이곳에 들이닥친 예군이 군사들을 모두 전멸시키고 왕만 홀로 탈출했다. 삼형제장군은 단신으로 왕을 모시고 백옥포(白玉浦)에서 투신해 최후를 마쳤다.

태기왕을 공격한 군대가 예국군대라는 설 이외에도 신라의 박혁거세의 군대라는 설도 있다.

태기왕 전설은 구체적인 인명과 지명이 나타나는게 특색이다. 이 전설은 태기산, 호령봉, 삼형제봉, 갑옷을 씻었다는 갑천(甲川), 옥새를 잃어버린 옥산대, 병사들이 전멸했다는 멸인(멸온), 왕이 죽었다는 백옥포, 왕이 도망치다 해가 저물었다는 무일리(무이리) 등의 지명으로 살아남아 있다. 춘천, 횡성, 평창등에서 전해지는 태기왕 전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전설로 치부하기 어렵고, 무엇인지 맥국과 관련한 큰 사건이 발생했음을 추정하게 된다.

가리왕산 전설:

평창군과 정선군 경계에 있는 가라왕산은 옛날 맥국 갈왕(葛王)이 피난해 성을 쌓고 머물렀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갈왕을 가리왕(加里王)이라고도 했다. 일제 때 일본을 의미하는 날 일()을 붙여 가리왕산(加里旺山)이라고 개명했는데, 갈왕산이라도 한다. 북쪽 골짜기엔 갈왕이 지었다는 대궐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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