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령 아메리카⑤…미국보다 먼저 일본 접촉
러시아령 아메리카⑤…미국보다 먼저 일본 접촉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8.2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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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자노프, 일본 특사로 임명…세계일주 도중 일본과 협상했으나 실패

 

일본의 대외 무역개방은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흑선을 에도만에 대기하고 통상을 요구, 도쿠가와 막부가 이듬해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는 것으로 시작된다. 미국의 캘리포니아를 손에 넣어 태평양국가가 된지 5년후의 일이다.

러시아는 미국보다 앞서 오호츠크해, 캄차카, 알래스카, 캘리포니아에에 진출, 태평양국가가 되었고, 일본-중국과 무역거래를 시도했다. 러시아는 미국보다 50~60년전에 일본에 개방을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러시아인 아담 락스만에 대한 일본인의 그림 /위키피디아
러시아인 아담 락스만에 대한 일본인의 그림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최초 개항요구는 1792년 아담 락스만(Adam Laxman)이 캄차카에서 쿠릴열도를 거쳐 홋카이도에 도착해 그곳 하코다데(函館) 관리를 통해 개항을 요구했다. 러시아 대표단은 모릎을 꿇고 고두(叩頭)하는 일본 관습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고, 락스만은 러시아 병사 450명과 함께 마쓰마에성(松前城)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도쿠가와 막부측은 사절을 홋카이도에 보내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나가사키에 한해 상선 1척의 입항을 허용하되, 다른 항구는 열지 않으며, 기독교 선교는 불가하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러시아는 나가사키에 한정하지만 일본이 네덜란드, 중국 다음으로 문을 연 것에 만족해야 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에 필요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일본과 정상적인 무역거래를 필요로 했다. 두 번째 사절단은 1803~1806년 사이에 추진된 러시아 세계일주항해 기간에 파견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세계일주항해를 추진하기 위해 영국에서 나데즈다(Nadezhda)호와 네바(Neva)호 등 2척의 대형 상선을 구입했다. 차르는 일본과 무역협상을 벌이도록 귀족 출신인 니콜라이 레자노프(Nikolai Rezanov)를 전권특임대사로 임명하고, 친서도 주었다.

레자노프는 알래스카와 알류산 열도에서 모피사업을 하는 셸리코프-골리코프 회사의 대주주인 그리고리 셸리코프의 사위였다. 장인이 죽은후 레자노프는 회사의 후계자로서 예카테리나 2세와 파벨 1세를 설득해 북미지역에서 모피사업 독점권을 획득하고, 셸리코프-골리코프 회사를 영국의 동인도회사처럼 러시아 아메리카 회사(RAC)로 전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레자노프는 RAC의 모스크바 본사 사장을 맡고, 알렉산드르 바라노프가 북미 지사장을 맡아 현지를 경영했다.

 

러시아의 제1차 세계일주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제1차 세계일주 /위키피디아

 

2척의 배에 승선한 러시아 원정대는 18038월 상트페테르스부르크를 출항했고, 레자노프는 2척 중 나데즈다호에 승선했다. 두 배는 코펜하겐, 영국 팔머스, 카나리아 제도, 브라질, 태평양의 누쿠 히바를 거쳐 18046월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때 북미 러시아 식민지에서 틀링깃족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네바호는 알래스카 싯카로 가서 원주민과의 교전에 참전했다. 레자노프가 탄 나제즈다호는 캄차카 반도로 갔다.

 

1804830일 레자노프와 그의 수행원은 일본과 통상협상을 벌이기 위해 캄차카를 출발했다. 나제즈다호가 규슈 사쓰마 해안에 도착한 것은 103, 일본 지방관의 안내를 받아 108일에 나가사키항 데지마(出島)에서 떨어진 해상에 정박했다. 데지마는 도쿠가와 막부가 네덜란드와 교류하도록 허용한 유일한 대외창구였다. 레자노프 일행은 아시아에 오기 전에 네덜란드로부터 일본과의 교역을 위한 정보를 입수, 사전에 습득하고 있었다.

 

나데즈다호와 러시아 의장대(일본그림, 1805) /위키피디아
나데즈다호와 러시아 의장대(일본그림, 1805) /위키피디아

 

레자노프는 쇼군에게 보내는 차르의 친서와 선물을 준비해 놓았다. 그때 쇼군은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쇼군을 자신과 동격으로 보고 친서에 황제라고 표현했다. 선물은 50개 박스나 준비했는데, 그 중에는 유리그릇, 촛대, 크리스탈 샹들리에, 손거울, 도자기, 상아로 만든 꽃병, 모피제품, 시계 등 당대 최고의 품목들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17세기초 카톨릭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데지마 이외의 교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러시아의 개항 요구에 대해 일본 관리들은 거덜떠 보지도 않았다. 일본 관리들은 러시아가 준비한 선물도 내용물을 훑어보고 모양을 그려 보고한 후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모피 가운데 가장 비싸고 귀한 여우 모피를 선물로 준비했으나 일본인들은 여우를 더러운 동물로 여기고 반가워하지 않았다. 일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코끼리 모형이 달린 시계와 만화경 정도였다.

 

레자노프 일행에 대한 일본의 대우는 냉랭했다. 나제즈다호는 항구에 접안하지 못하고 바다에 떠 정박해야 했다. 선원들은 몇 달째 선상 생활을 하면서 질병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달째 되던 때 폭풍이 불어 배가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레자노프는 외국사절에게 이런 대우를 할수 있느냐고 노발대발하는 바람에 일본은 겨우 러시아 배의 접안을 허용했고, 선원들의 입항제한도 풀어주었다. 레자노프에겐 사택이 하나 주어졌는데, 주변엔 대나무 담을 쌓아 감금상태가 되었고, 선원들도 100m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측은 러시아병사의 무기도 회수했다. 다만 칼은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

 

러시아측 선물 내용과 게이샤의 손을 잡고 있는 레자노프(일본그림, 1805) /위키피디아
러시아측 선물 내용과 게이샤의 손을 잡고 있는 레자노프(일본그림, 1805) /위키피디아

 

도쿠가와 막부는 러시아와 교역할 마음이 없었다. 하급 통역관을 보내 상대하게 했다. 레자노프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러시아 사람들의 태도에 의아해 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300년 동안에 일본이 제시한 조건을 충실히 지키고, 무릎도 꿇고 절도 했는데, 러시아인들이 고압적으로 나오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측은 외국손님을 접대한답시고 레자노프에게 게이샤를 붙여주었다. 레자노프는 일본 여인이 이를 검게 물들이는 관습(歯黒)을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문호는 닫아걸었지만 외국인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레자노프 주위에는 네덜란드 학문(蘭學) 고수들을 배치해 러시아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게 했다. 그들의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다. 러시아 생물학자가 억류되다시피한 상황에서 일본의 동물과 식물을 분류하고 연구했는데, 난학 전문가들이 그것을 보고 경탄했다고 한다.

 

해를 넘겨 18053월 에도에서 온 관리들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그들은 레자노프와 러시아 사절단에게 네덜란드와의 통상 범위를 넘어설수 없다며 러시아의 통상제의를 공식적으로 거절했다. 레자노프는 화가 나서 즉시 철수를 명령했다.

일본측은 러시아가 마련한 선물의 수령을 거절했다. 대신에 쇼군은 선원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 선물 내역이 어마어마하다. 5,569kg, 소금 23.7, 비단 25박스. 여기에다 돌아갈 때 먹을 식량으로 건빵 2,457kg, 밀가루 3박스, 싸케 15박스, 염장어류와 돼지고기 등 다수를 주었다. 무기도 돌려주었다.

러시아 선박은 쇼군의 선물과 차르가 준비한 선물을 모두 싣는데만 열흘이 걸렸다고 한다. 통상교섭을 하러 와 선물은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선물만 받아간 것이다.

 

니콜라이 레자노프 초상화 /위키피디아
니콜라이 레자노프 초상화 /위키피디아

 

레자노프 일행은 캄차카로 돌아오는 길에 사할린을 둘러 보았다. 사할린은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캄차카에서 레자노프는 비리혐의를 받고 적자에 시달리는 러시아 아메리카 회사(RAC)를 감사하라는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알래스카로 건너가 RAC의 회계장부를 들여다 보았다. 소문과 달리 바라노프는 깔끔하게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알래스카의 환경에 현지 러시아 회사의 식량난이 극심했다. 레자노프는 1806년 캘리포니아로 남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페인 당국에게서 식량을 매입하고, 식민지 개척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때 3개월간 샌프란시스코 만에 체류하면서 스페인 총독의 딸과 국경과 종교를 초월한 연애를 했다.

레자노프를 데려온 나제즈다호는 이미 본국에 돌아갔기 때문에 그는 시베리아 육로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돌아가기 직전에 일본에 복수를 했다. RAC의 상선을 동원해 사할린을 일방적으로 포격한 것이다.모스크바의 인가를 받지 않은 전쟁이었기 때문에 사전(私戰)에 해당했다. 그는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해 차르에게 사후 승인을 받을 작정이었다.

그는 수도로 돌아가던 중 180738일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머물 때 열병으로 사망했다. 43세의 꽃 다운 나이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약혼녀 미리아 드 라 콘셉시온(María de la Concepción)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수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참고자료>

Wikipedia, First Russian circumnavigation

Wikipedia, Nikolai Rezanov

Wikipedia, Adam Lax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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