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령 아메리카⑥…북미대륙에서 철수
러시아령 아메리카⑥…북미대륙에서 철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8.2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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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 고갈로 북미 사업 적자 심화…영불의 포격, 미국 영토 확대에 미리 매각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러시아에 수익을 내주지 못했다. 러시아 아메리카 회사(RAC)는 발족 초기에 잠깐 수익을 냈을 뿐, 그후로는 정부 보조금만 받아먹는 적자 공기업으로 전락했다. 수도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멀다보니 아메리카 식민지는 통제도 어려웠다. 전보도 없고 철도도 깔리지 않았던 시절, 수도에서 산 넘고 강 건너 알래스카까지 가려면 1년은 족히 걸렸다. 가까운 곳에 영국 식민지(캐나다)가 바짝 다가왔고, 그 남쪽에 신생 미국이 태평양을 향해 세력을 뻗쳐가고 있었다.

 

1815~1817년 하와이에서 벌어진 섀퍼 사건(Schäffer affair)은 러시아령 아메리카 식민지의 모순을 격화시켰다. 하와이 왕국을 전복하고 열도를 보호령으로 하는 문제에 대해 RAC와 러시아 해군의 견해가 달랐다. RAC의 현지 경영자 알렉산드르 바라노프는 하와이에서 일을 벌이고 있는 게오르그 섀퍼를 지지하거나 묵시적으로 동조한 반면에 해군은 세계 최강국인 영국과 새롭게 부상하는 미국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섀퍼 사건은 러시아 해군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RAC의 경영자 바라노프는 책임을 져야 했다.

큰 문제는 RAC의 부채였다. 섀퍼는 하와이에서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2척의 상선을 구입하고 각종 대금을 처리했는데, 그 비용이 20~23만 루블에 이르렀다. 섀퍼는 일을 저질러놓고 해외로 도피했지만 막대한 부채는 고스란히 RAC에 전가되었다. RAC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해군이 경영자 바라노프의 경질을 요구했다.

유럽 언론들은 러시아가 태평양에 진출한다고 떠들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사시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폴레옹 전쟁 직후, 영국이 유럽의 판세를 흔들고 있었다. 러시아 외무부는 런던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해군은 차제에 RAC를 직속 기관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1818년 바라노프는 러시아 아메리카의 총독겸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는 해군장교출신인 루드비히 폰 하게마이스터에 이어 셰묜 야노프스키에게 넘어갔다. 바라노프는 귀국하던 중 네덜란드 식민지인 바타비아(인도네시아)에서 18193월 사망해 순다해협에 수장되었다.

 

런던에서의 해달모피 판매 추이 /위키피디아
런던에서의 해달모피 판매 추이 /위키피디아

 

1821년 상트페테르스부르크 조정은 RAC에 대한 북미 사업 독점권을 20년 연장했다. 그후 러시아 정부는 1867년 북미 영토를 미국에 매각할 때까지 RAC의 사업면허권은 20년 단위로 연장해 주었다.

해군이 맡고 난 이후 RAC는 경영은 더욱 엉망이 되었다. 장교 출신 경영진은 북미 공기업을 이권 챙기기 수단으로 간주했고, RAC는 갈수록 복마전으로 변해갔다.

RAC의 주요사업인 모피사업도 사양화되어 갔다. 알래스카에선 모피 동물들이 남획으로 고갈되어 갔고, 캐나다와 미국인들이 모피 사업에 뛰어 들면서 러시아는 경쟁력을 잃어갔다. 1803~1846년 사이에 미국인 배 72척이 캘리포니아에서 해달 사냥에 간여해 4만 마리를 잡았는데, 같은 기간에 러시아인들은 북미에서 13척으로 5,696마리를 잡았다. 모피 하면 러시아였눈데, 북미에서 그 주도권이 북미에서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1800년대 후반부로 들어가면 해달모피 생산량이 급감했다. 러시아인들이 알류트족들을 학대하면서 원주민 인구가 급감한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러시아에선 북미 영토에 대한 매력을 잃어갔다. 알래스카 면적은 텍사스의 2, 그 넓은 땅을 러시아인 700명이 지키고 있었다. 알류트족을 비롯, 원주민은 4만명. 내륙의 틀링깃 족은 저항하고 러시아는 해안의 도시와 섬을 이어가며 지배하고 있었다. 모피사업이 급감하면서 러시아인의 숫자가 줄어들고 식량자급을 위해 조성한 캘리포니아 식민지(포트 로스)의 필요성도 사라져 1841년 현지 멕시코인에게 매각했다.

 

미국은 1846~1848년 멕시코와 전쟁을 일으켜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 오레건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확장했다. 미국인들은 그동안 개인적으로 태평양에서 사업을 했지만, 이때부터 영토도 새로운 대양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차지한 이듬해 그곳에서 금광이 터지자 돈에 미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알래스카에 금이 발견된다면, 멀리 있는 러시아인들보다 가까이 있는 미국인들이 먼저 달려갈 것이다. (1896년 캐나다령 유콘에서 금맥이 터지자 10만명의 채굴자들이 툰드라 지대로 몰려들었다.) 러시아 지도부층에선 이런 변화를 예민하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포위전(1854) /위키피디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포위전(1854) /위키피디아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유럽국가다. 아시아에 붙어 있는 시베리아, 시베리아보다 더 멀리 있는 아메리카의 영토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는 예루살렘 성지 분쟁에 개입하다 크림전쟁(1853~1856)에 휘말렸다.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투르크의 편을 들어 참전하면서 러시아는 이 전쟁에 대패했다.

크림 전쟁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는 1854년 캄차카 반도를 공격했다. 당시 세계 해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 함대가 태평양을 들락거리는 것을 두고만 보지 않았다.

전쟁은 무력사용을 허용하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영국이 사전에 검토한 타깃은 세 군데였다. 러시아의 북미 거점인 누보 아르한겔스크(싯카), 캄차카반도의 수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오호츠크였다. 영국은 세 군데 중 페트로파블로프스크(Petropavlovsk)를 선택했다. 당시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캄차카가 오흐츠크와 아메리카 식민지를 연결하는 중간거점이었다. 러시아인들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에서 알류산 열도를 징검다리처럼 이용해 알래스카로 건너갔다.

영국의 입장에선 캄차카를 차단하면 알래스카를 봉쇄할수 있었다. 축치반도를 거쳐 베링해를 건너는 길은 이론적으론 가능하지만 위험하고 불가능했다.

태평양 상에 동원가능한 배는 영국 3척과 프랑스 3척 등 모두 6척이었다. 총병력 2,540, 200문의 대포를 갖추고 있었다. 캄차카 수도에 러시아 병력은 1,000명에 못미치는 988명이고, 대포도 68문에 불과했다. 185491일부터 4일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함대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항고를 집중포격하고 상륙을 시도했지만 러시아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영불 함대는 이 요새의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따끔한 맛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포위전(Siege of Petropavlovsk)에서 양측의 피해는 비슷횄다. 하지만 러시아 조정은 오호츠크~캄차카~알래스카로 이어지는 태평양의 연약한 고리가 언제라도 공격 받을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크림전쟁은 러시아에게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주며 패배를 안겨주었다.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승국에게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했다.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매각한 것은 배상금 마련을 위한 것이라는 가설보다는 알래스카를 지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

 

1867년 3월 30일 알래스카 매매 계약. 지구본 옆에 앉아 있는 이가 윌리엄 슈어드 미국 국무장관. /위키피디아
1867년 3월 30일 알래스카 매매 계약. 지구본 옆에 앉아 있는 이가 윌리엄 슈어드 미국 국무장관. /위키피디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생 콘스탄틴 대공이 총대를 멨다. 그는 크림전쟁이 끝나고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를 설득했다. “미국이 우리의 소유를 끊임 없이 포위하고, 북미대륙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도 없고, 오히려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북미 식민지를 지킬수 없습니다.”

콘스탄틴 대공의 논리는 외무장관, 해군장관, 주미대사를 설득해 권력그룹에 공감대를 형성했고, 마침내 차르의 승인을 받아냈다.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영국에 팔 생각은 없었다. 당대 패권국이었던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알래스카를 산다면 태평양에서의 힘의 균형이 형성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에 알래스카 매입을 제의했다. 하지만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이 일어나기 직전의 대혼란기여서 북극의 동토를 살 겨를이 없었다. 협상은 내전이 종식된 다음부터 시작되었고, 1867330일 최종 타결을 보게 되었다. 가격은 720만 달러였다.

1799년 러시아 아메리카 회사를 설립한지 68년만에 러시아는 북미 대륙에서 완전 철수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Wikipedia, Alaska Purchase

Wikipedia, Siege of Petropavlov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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