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청암정 등 3건 보물 지정 예고
봉화 청암정 등 3건 보물 지정 예고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2.08.26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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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보물로 지정

 

경북 봉화 청암정, 영주 부석사 안양루, 영주 부석사 범종각 등 3건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봉화 청암정, 영주 부석사 안양루, 영주 부석사 범종각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봉화 청암정 /문화재청
봉화 청암정 /문화재청

 

봉화 청암정(靑巖亭)

안동 권씨 충재종택 경역 내에 위치한 정자로, 인근에 위치한 석천계곡의 석천정(石泉亭) 등과 함께 현재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청암정기(靑巖亭記, 1682), 선생수서목편식(先生手書木片識, 1724)등의 역사 문헌에 1526년 충재 권벌이 살림집의 서쪽에 세운 사실이 기록돼 있다.

16세기 사대부들이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개인적인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을 위한 개인 거처를 집 주변이나 경치 좋기로 이름난 곳에 정자 형태로 짓는 방식을 가거(家居)라 일컬었는데, 봉화 청암정은 이러한 사대부 주거문화의 사례다. 또 이곳은 안동 권씨 가문과 인근 지역의 크고 작은 일을 논의하는 회합의 장소로도 사용되어 역사적 자산으로 인식되어 왔다.

봉화 청암정은 연못 한가운데 놓인 거북형태의 바위라는 한정된 공간과 바닥의 불균형을 고려하여, 궁궐식의 높은 기단을 세우고, 바닥을 채워 마루와 온돌을 놓았다. 경상도 일원에 분포하는 자형 평면을 가진 정자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다. 또한 창문을 비롯한 주요 구조는 17세기 이전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정자건축이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 /문화재청
영주 부석사 안양루 /문화재청

 

영주 부석사 안양루(安養樓)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문루다. 국보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위치한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의 형식을 가진, 16세기 사찰 문루 건축의 대표적 사례이다.

계암일록(溪巖日錄, 1615),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浮石寺 安養樓 重刱記, 1644)등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기존에 있던 강운각(羌雲閣)’이라는 단층 건물이 1555년 화재로 소실된 자리에 1576년에 현재의 안양루를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안양루는, 사찰의 진입 축()을 꺾어 무량수전 영역에 진입하도록 배치한 점, 누마루 아래로 진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 공포와 대들보의 구성 등에 조선 중기 또는 그보다 이전에 사용된 오래된 기법이 남아 있는 점 등이 특이하다.

 

영주 부석사 범종각(梵鐘閣)

영주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종각으로, 정면 3,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의 형식을 가진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종각 건축이다.

범종각은 계암일록(1615), 부석사기(1651)등의 문헌자료에 종루(鍾樓)’, ‘종각(鐘閣)’ 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부석사 종각 중수기(1746)에 따르면, 1746년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인 1747년에 중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청량산유록(淸涼山遊錄, 1780)등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범종각 내부에 쇠종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19세기 이후 해당 범종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일반적으로 종각이 사찰 좌우에 배치되는 것과 달리 사찰의 진입 중심축에 위치한 점, 아래층 가운데 칸을 지나 계단을 거쳐 안양루로 통하는 형식인 점, 지붕의 포와 포 사이에 놓여 무게를 받치는 부재인 화반을 덩굴나무 모양의 파련초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점, 지붕 내부에 범종각 재건 당시 것으로 판단되는 단청이 남아 있는 점 등에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한편 문화재청은 경상북도 영천시에 위치한 인종대왕 태실(胎室)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 12대 임금인 인종대왕이 태어난 지 6년이 지난 1521(중종 16)에 의례에 따라 건립되었으며, 태를 봉안한 태실(胎室)1546(명종 1) 가봉(加封) 때 세운 비석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종은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 재위 기간이 짧아 곧바로 가봉하지 못했다.

인종대왕 태실은 태실봉 정상부에 비교적 넓게 형성된 편평한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 의궤에 묘사된 격식에 따라 전체 평면은 8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에 태가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중동석(中童石)을 놓았다.

인종대왕 태실은, 1680년에 파손된 부분을 수리해 1711년에 태실비가 재건되면서 태실로서의 격식을 되찾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이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이후 태실은 방치되었다가, 1960~70년대 매몰된 석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9년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200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원형을 회복하였다.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시대 태실 의궤에 따른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태실의 규모가 크고 석물을 다듬은 기법이 우수하다. 또한 설치 과정과 내력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해져,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높다. 태실은 가봉된 이후 파손된 적도 있었으나, 처음 설치되었던 원 위치에서 비교적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인종대왕 태실은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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