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①…러시아, 동아시아 패권국 부상
연해주①…러시아, 동아시아 패권국 부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8.27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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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쇠약해진 틈에 러시아가 차지…아시아 진출의 발판 마련

 

몽골을 외몽골과 내몽골로 나누듯, 만주도 편의상 내만주와 외만주로 나눈다. 내만주는 현재 중국의 동북3성 지역을 말하고, 외만주(外滿洲)는 본디 중국 땅이었다가 1858, 1860년 두차례 협정으로 러시아에 넘어간 지역을 말한다.

외만주는 중국에서 외동북(外東北)이고도 하는데,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주, 하바로프스크주 일부, 유대인자치주, 아무르주, 사할린주의 5개주를 포함한다. 면적은 100를 웃도는데, 남한의 10, 한반도의 5배에 달하며, 미국 알래스카(66.3)1.5배나 된다.

이 광대한 지역의 주인이 2년이라는 눈 깜빡하는 짧은 시기에 중국에서 러시아로 넘어간다. 러시아가 아무르강과 연해주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과연 아시아 국가라고 할수 있었을까. 러시아의 연해주 획득은 동북 아시아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이 땅을 가진 이후부터 러시아는 동북아 권력지형에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또 유럽국가였던 러시아가 우리 영토와 접하게 되었고, 우리 근현대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러시아가 극동아시아의 이 넓은 땅을 차지한지 7년후(1867) 아메리카 영토(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했다. 러시아는 툰드라에 비해 덜 춥고 경작이 가능하고 쓸만한 연해주를 확보한 후 번거롭고 다루기 힘든 알래스카를 떼어낸 것이다. 그 당시 중국의 청나라는 쇠약하고, 미국은 떠오르는 나라였다는 사실이 지정학적 변화의 배경이 된다.

 

외만주 지역 /위키피디아
외만주 지역 /위키피디아

 

외만주의 선주민은 말갈족이며, 그 후예가 만주족이다. 고대에 이 지역은 고구려, 발해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후 중국사에서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분류되었다. 사할린섬에는 일본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이 토착했고, 아무르강(黑龍江) 하류엔 퉁그스계통의 니브흐족(Nivkhs)이 살았다.

중국은 일찍부터 사할린이 섬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1264년 사할린의 아이누족이 니브흐족을 공격하자, 니브흐족은 몽골()에 지원을 요청했고, 몽골은 니브흐족에게 식량과 무기를 지원했다. 몽골은 1273, 1274년 사할린을 공격했으나, 타타르해협의 바다에 막혀 공격을 멈췄다. 이 경험을 살려 1284년에 몽골은 겨울을 기다려 11월에 해협이 얼어붙자 얼음 위를 건너가 사할린 남쪽 끝인 크릴론 곶(Cape Crillon)까지 아이누족을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와 선덕제(宣德帝) 시기인 1413~1433년 사이에 이시하(亦失哈)라는 환관이 원정대를 이끌고 아무르강 하류와 사할린을 지배 하에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시하는 그곳에 영령사(永寧寺)라는 절을 세우고 칙수노아간영령사비기(勅修奴兒干永寧寺碑記)와 선덕중건영령사기(宣德重建永寧寺記)라는 두 개의 비석을 남겼다. 명나라는 누르칸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관을 만들어 그 일대를 지배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고향인 만주에 대해 봉금(封禁)정책을 채택해 이민족의 진입을 금지했고, 외만주는 중원으로 내려가지 않은 만주족 일파가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진출하면서 외만주를 넘보기 시작했다. 17세기초 레나강에 도달한 코사크들은 농경지를 찾아 남하했다. 예로페이 하바로프가 아무르강을 탐험한 이후 아무르강 유역에 알바진에 요새를 구축했다. 당시 청나라는 강대했다. 러시아와 청나라는 아무르강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조선도 청나라 편에 가담했다.(나선정벌)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승리했다. 러시아는 1689년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아무르강의 지배권을 청나라에게 념겨줬다.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청-러시아의 국경은 스타노보이(外興安嶺)산맥으로 설정되었다. 이 산맥을 경계로 북쪽의 강은 북쪽으로 흘러 북극해로 흐르고, 남쪽의 강은 동쪽으로 흘러 태평양으로 흐른다. 또 이 산맥의 남쪽에선 경작이 가능하지만, 북쪽에는 곡물을 생산할수 없다.

아무르강은 몰골고원에서 발원, 태평양으로 흐르는 큰강이다. 러시아가 아무르강을 노린 주목적은 태평양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는 아무르강을 항해할수 없었기 때문에 캄차카반도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태평양 관문으로 활용했다. 캄차카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레나강에서 오호츠크로 가려면 콜리마산을 넘어야 하는데, 그곳은 악마가 산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위험한 길이었다. 오호츠크에서 캄차카로는 또 배를 타야 했다.

그런데 아무르강의 뱃길을 이용활수 있다면 바이칼호에서 산을 하나 넘으면 강을 따라 태평양으로 나갈수 있다. 러시아인들은 아무르강을 하류까지 탐험하지 못했다. 하류엔 물이 3~4피트박에 되지 않아 배가 다닐수 없다는 소문도 있었고, 사할린이 섬인지 반도인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이미 중국인들이 수백년전부터 습득한 사실을 러시아인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 윌리엄 브라우턴의 사할린 탐사 /김낙현·홍옥숙 논문
영국 윌리엄 브라우턴의 사할린 탐사 /김낙현·홍옥숙 논문

 

18세기가 되면서 아무르강 하구와 사할린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700년대말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태평양을 탐사한 후 영국은 태평양 구석구석을 뒤지며 지형을 탐색했다.

1797년 영국 해군의 윌리엄 로버트 브라우턴(William Robert Broughton) 선장이 이끄는 프린스 윌리엄 헨리(Prince William Henry)호가 아시아 대륙과 사할린 섬 사이를 탐사했다. 브라우턴의 배는 오키나와에 도착한 후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을 통과해 사할린 좌측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중 915일 사할린 서쪽 티크 곶(Mys Tyk)과 러시아 동쪽의 다비도바 곶(Mys Davydova) 사이의 해상에서 항로를 바꾸었다.

브라우턴은 타타르만으로 항해하는 동안에 항해사에게 항해가 가능한지를 살펴보게 했다. 항해사는 수심이 충분하다고 주장했지만 브라우턴은 앞서 배를 한번 좌초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진입하지 않고 배를 회항시켰다.

브라우턴은 사할린이 아시아 대륙의 연장인 반도로 파악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1024(음력 824) 부산 용당포에 도착해 9일간 조선에 머물다 떠났다. 브라우턴은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영국인이었고, 그에 대한 기록은 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 마미야 린조가 1810년에 그린 사할린섬 지도 /위키피디아
일본인 마미야 린조가 1810년에 그린 사할린섬 지도 /위키피디아

 

일본인 마미야 린조(間宮林蔵)가 러시아인에 앞서 사할린과 아무르강을 탐험했다. 히타치국[常陸國, 이바라키현) 출신인 그는 수리 재능을 인정받아 도쿠가와 막부의 하급관리로 출발해 1800년 이노다다타카(伊能忠敬)의 북방탐험을 수행하며 측량술을 배웠다. 그는 막부의 명을 받고 1803년에 서사할린, 1808년에는 북사할린 동해안을 탐험했다. 그해 마미야는 단신으로 북상, 아무르강을 거슬러 올라가 명나라 때 환관 이시하가 세운 비석을 발견했다. 이 일본인은 사할린이 아시아 대륙과 떨어져 있는 섬임을 실증하고, 지도를 그렸다. 후에 프랑스 해군장교(Jean-François de La Pérouse)가 이 사실을 알고는 현재 타타르 해협을 마미야 해협이라 명명했다.

 

영국인과 일본인의 사할린 탐사는 주인이 집을 비웠을 때 몰래 들여다보는 정도였다. 청나라가 강대했기 때문에 내 집에 왜 왔냐고 하면 영국과 일본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게 패배함으로써 동양의 패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중국에 태평천국의 난(1850년에서 1864)이 일어나자 청국은 만주를 비워둔채 내란 진압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내우(內憂)는 외환(外患)을 초래한다. 외만주는 청나라의 군사력과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고, 그곳에 주재하는 청나라 관리들도 무기력했다.

드디어 러시아가 네르친스크 조약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아무르강을 휘젖고 다니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Nikolay Muravyov-Amursky

Wikipedia, Amur Annexation

Wikipedia, Nikolayevsk-on-Amur

Wikipedia, Mamiya Rinzō

김낙현·홍옥숙, 브로튼 함장의 북태평양 탐사항해(1795-1798)와 그 의의, 2008, 한국해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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