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뱃길②…유적지를 찾아서
삼별초의 뱃길②…유적지를 찾아서
  • 아틀라스
  • 승인 2019.06.2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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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성, 진도 용장산성, 제주 항파두리성·환해장성에서 대몽항쟁의 숨결이…

 

이 글은 시인이자 고대해양탐험연구소장인 채바다씨가 2016년 이사부사업회 주관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몽골의 고려 침략은 1231(고종 18)에 시작되었다. 고려는 1232년에 개경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는 대몽항쟁을 선언하고 이들의 집요한 침략에 대항하며 나라를 지켜 냈다. 그 중심에 삼별초가 있다.

필자는 몽골의 침략에서 끝까지 대항하며 고려를 포기 하지 않았던 삼별초의 정신에 큰 감화를 받았다. 이들의 항쟁은 주로 해상에서 이루어 졌기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졌다.

삼별초는 대몽항쟁을 선언하면서 강화섬에서 진도 용장산성, 제두 항푸두리성으로 이동했다. 필자는 이곳들을 방문하면서 한결 같이 삼별초의 주요 활동무대였기에 그 흥분이 더 했다.

성곽은 전쟁에서 최후의 방어 공간이며 공격의 공간이다.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처음이며 마지막 방패막이다. 어느 고대 국가를 막론하고 성()은 최고의 석축기술을 동원하고 있다.

이처럼 성()은 그 나라의 국력이며 상징을 나타내는 걸작품이다. 이렇게 쌓은 토성과 석성들은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고 상당한 고초를 겪으면서 쌓은 역사의 숨결이다.

삼별초의 성들은 축성 공법과 디지안에서 치밀하고 견고하게 축성되었다. 또한 여기에서 예술성까지 담아내었다. 다양한 산기슭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곽 배치와 공간처리에 놀랍다. 과학적인 축성 기술과 토목 공법들을 동원했다.

 

강화산성 /문화재청
강화산성 /문화재청

 

강화산성(江華山城)

강화 고려성은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정권 최우(崔瑀) 일파가 개성에서 강화로 도읍 하면서 12341월 축성 시작 13년 걸려 축성했다. 빈번한 몽골의 침략으로 개경성을 모방하여 내성중성외성으로 축성 되어 있다.

남문인 안파루(晏波樓), 북문인 진송루(鎭松樓), 서문인 첨화루(瞻華樓) 동문인 망한루(望漢樓)가 남아있다. 1964610일 사적 제132호로 지정. (문화재청)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그 후 수차례 복원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도 용장성 /문화재청
진도 용장성 /문화재청

 

진도 용장산성(龍藏山城)

용장산성은 1964610일 사적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총 길이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 높이는 4m 내외로 복원되어 있고, 성내에는 복원된 용장사지(龍藏寺址)와 궁궐지(宮闕址)로 파악되고 있다.

산성 구간의 지형에 따라 토성과 석성으로 되어 있다. 현재까지 출토된 명문기와, 자기류, 동전류 등의 유물로 볼 때 신안군 압해도 출토 명문기와를 감안하면 1243(고종 30)용장산성이 축조시기로 보고 있다. 1270(원종11) 8월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오기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또한 여러 마을과 해안선 그리고 능선을 따라 축성 하고 있다. 조사결과 약 13에 이르는 성벽과 함께 고려시대 성문형식으로 성문지 6개소,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치와 적대 3개소, 제사 관련 건물지와 장대를 비롯한 수십 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강화도와 진도는 조석간만의 차이로 인해 6~7노트를 상회하는 거친 물살을 생긴다. ()들은 몽골의 상륙과 공격이 불리하도록 좁은 해역에서 험한 조류를 활용했다. 이러한 고도의 해상 전략과 전술에서 삼별초의 해양력(조선, 항해기술)에 놀라게 된다.

 

제주 항파두리성 토성.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 홈페이지
제주 항파두리성 토성.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 홈페이지

 

애월 항파두리성(缸波頭里城)

항파두리성은 북쪽으로 수평선을 훤히 바라다 보여 해상으로 진입하는 적 동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곳은 하천을 최대한 이용하여 주위 15리에 달하고 있다.

외성의 면적은 약 24만평. 동서남북에 문이 있었고 주위가 하천과 언덕을 이용하여 토성과 석성으로 축성하고 있다. 이러한 축성 방식은 한반도의 성곽 축성 기술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20110819일 이곳 유적지 시굴조사에서 삼별초와 관련한 유물들이 출토 되었다.(제주고고학연구소).

상귀리 92,223에서 성벽 하단 기초석렬과 판축된 성토층에서 초석, 문지도리, 적심석, 수혈 유구와 망루지, 소토유구 등 총 108기 등이다. 유물 가운데 상감청자류와 숫막새와 암막새, 암키는 13세기 말 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청동바늘, 청동젓가락, 고누놀이판 등이 발굴되어 삼별초에 관한 유물로 보고 있다.

발굴한 기와조각 중에는 당초(唐草)무늬가 새겨져 있는 헌평와(軒平瓦) 조각과 "고내촌(高內村)...신축이월(辛丑二月)..."이라고 명문(銘文)된 조각들이다. '신축년'은 고려 고종 28(1241)에 해당된다. 성내에서 색상이 선명한 고려청자 파편과 거대한 초석(礎石)이 흩어져 있고, 불상도 출토된 바 있다.

 

환해장성 /채바다씨 제공
환해장성 /채바다씨 제공

 

환해장성(環海長成)

환해장성은 1270년 영암 부사 김수가 고려정부의 병력을 이끌고 삼별초의 상륙에 대비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주 해안선을 따라서 섬을 방어하기 위해 지형에 따라 대략 높이 2m 내외 석성이다.

성의 길이는 120km.에 달한다. 제주시 북쪽으로 애월읍 고내리, 동쪽으로 조천, 함덕, 성산읍, 온평리와 신산리 해안도로, 대정 일과리, 영락리 등지에서 만나게 된다. 조천과 함덕 사이의 해안 도로에는 대략 3-4미터 높이다.

해안 절벽을 제외하고 섬 전체를 성으로 쌓았다. 이어서 고여림 장군이 700여 명의 군사를 지휘하며 가세하였다. 이런 장성을 쌓기에 제주민들의 커다란 고초가 뒤 따를 수밖에 없다.

이후로도 조선시대 들어 와서도 왜적이 침략이 잦아 보수 보완했다. 이양선( 異樣船)이 출몰로 헌종 11(1845)에 환해장성을 수리했다. 탐라기년에 기록이 있다.

 

제주 항파두리성에서 삼별초의 최후혈전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 홈페이지
제주 항파두리성에서 삼별초의 최후혈전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 홈페이지

 

제주 항파두리성 축성도.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 홈페이지
제주 항파두리성 축성도.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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