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③…어부지리
연해주③…어부지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8.2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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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가 내우외환에 시달릴 때 아이훈 조약, 베이징 조약 통해 획득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된 이후 170년 동안 러시아는 아무르강 유역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이 내우외환의 혼란에 빠벼증바 1847년 극동시베리아 총독으로 발령받은 니콜라이 무라비요프는 부하들을 시켜 아무르강을 탐험하고 정착촌을 세웠다.

1858년에 아무르강 유역에 만들어진 러시아인 정착촌이 35개에 이르렀고, 무라비요프는 우랄산맥에서 생산된 대포를 극동까지 끌고 왔다. 몽골 국경에서 아무르강 하구까지 무라비요프가 동원할수 있는 병력은 수만명에 이르렀다. 코사크 정착촌은 병영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비해 중국의 헤이룽장(黑龍江) 주둔 병력은 1만명 정도였는데, 대부분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동원되어 아무르강 변경에는 1천명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양측 전력은 러시아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아무르강 유역 /위키피디아
아무르강 유역 /위키피디아

 

무라비요프는 힘의 우위를 배경으로 청나라 지방관 영토협상을 벌였다. 당시 아무르강(흑룡강)을 책임지던 중국인은 이샨(奕山)이었다.

1860년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위키피디아
1860년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위키피디아

 

이샨은 청 황족인 아이신 교로하라 씨 출신으로, 1차 아편전쟁 때에 광저우에 근무하다가 영국군 공격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인물이다. 그후 신쟝 지역에서 일리장군으로 근무하며 러시아와 쿨자협정을 체결한 이력이 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영토를 보전하는 강직함보다는 상대국에 적절히 타협하는 것에 익숙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이었다. 그후 이샨은 흑룡강 장군이 되어 만주로 부임했다.

러시아의 이르쿠츠크 총독 무라비예프는 중국 흑룡강 장군 이샨에게 네르친스크 조약을 개정해 아무르강을 새로운 국경으로 설정하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멍청한 만주족 귀족이라도 60나 되는 엄청난 땅을 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샨은 170년전에 체결된 조약을 지킬 것을 주장하며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러시아측 정착촌 건설은 계속되었다. 코사크들은 아무르 일대가 제 땅이나 되는줄 알고 현지인들에게 세금(야식)을 뜯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코사크의 행동은 약탈이었다. 청군은 국경을 넘어 약탈을 일삼는 코사크 300명을 죽였다. 무라비요프는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중국의 도발이라고 우겼다.

18585월 그는 흑룡강 장군의 거소인 아이훈(璦琿)을 찾아와 겁을 주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2년 전에 청에 전쟁을 선포해(2차 아편전쟁) 베이징의 외항인 톈진을 점령하고 있었다. 무라비요프는 중국이 국경 조정을 받아들인다면 러시아 군대가 영·불 군대를 저지시켜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무라비요프는 군대와 대포를 아무르강과 우수리강 주변에 배치했다. 협상이 깨지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의도를 보였다.

이샨은 겁을 먹었다. 만주족 지방관의 눈에는 영국·프랑스 군대가 수도의 코 앞까지 진출했는데, 러시아 군대마저 국경을 넘는다면 나라의 앞날이 암담해 보였다. 무라비요프의 공포조성 작전은 성공했다. 528일 러시아 이르쿠츠크 총독과 청국 흑룡강 장군은 조약을 작성했다. 아이훈 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은 만주어, 몽골어, 러시아어로 작성되었다.

조약의 골자는 아무르강 이북의 땅을 러시아에 넘겨주고, 우수리강 동쪽(연해주)를 공동관리로 둔다는 것이었다. 이때 러시아가 얻은 영토는 60, 한반도 세배 넓이의 면적이다. 공동관리로 남겨둔 땅은 40이며, 둘을 합치면 100에 이른다. 무라비예프는 이 공로로 아무르스키(Amurskii)라는 이름의 백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아이훈 조약은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아이훈 조약은 두 지방관이 체결한 조약으로, 중앙정부의 비준을 받지 못했다. 러시아 차르는 비준했지만, 청의 함풍제는 이샨의 조치에 노발대발하며 비준을 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훈 조약을 정식 조약으로 전환해야 했다. 청 황제가 아이훈 조약을 비준하지 않으면 무효가 되고, 러시아 정착촌은 불법이 된다.

러시아는 해군제독 예프피미 푸티아틴(Yevfimy Putyatin)을 베이징에 파견했다. 푸티아틴은 중국과 영불 대표단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했지만, 그의 중재 노력은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다. 청 조정은 러시아측 요구가 너무나 일방적이어서 단호히 비준을 거부했다.

푸티아틴의 중재가 무산되자 1859년 러시아는 27세의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Nikolai Ignatiev) 백작을 협상대표로 파견했다. 그는 만주족 실세이자 서태후의 측근인 쑤순(肅順)에게 아이훈 조약을 비준하고 중국 내륙으로 무역을 할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쑤순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1858년 아이훈 조약의 결과. 주홍색 부분은 공동통치지역으로 남겨두었다가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령이 되었다. /위키피디아
1858년 아이훈 조약의 결과. 주홍색 부분은 공동통치지역으로 남겨두었다가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령이 되었다. /위키피디아

 

조약 비준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와중에 뜻하지 않는 사태가 전개되었다. 1860년 여름 청불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하고 청 황실의 여름 궁전인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우고 많은 보물과 집기들을 약탈했다. 함풍제는 여름 수도 열하(熱河)로 도피했다. 영국군은 차제에 청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구상했다. 청조는 황실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청조의 위기는 러시아에 기회였다. 사태의 추이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이그나티예프는 서태후의 외교를 대행하는 공친왕에게 중재안을 내밀었다. 아이훈 조약을 비준한다면 연합군과의 분쟁을 조정하고 배상금을 줄여주고, 영불 군대를 베이징에서 철수시키도록 노력하겠노라고 했다. 러시아의 젊고 노회한 외교관은 덧붙여 우수리강 동쪽, 즉 연해주도 공동관리에서 러시아령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100의 땅을 주는 조건으로 영불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는 것이다.

300년 왕조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순간, 공친왕은 러시아의 요구를 덥석 물었다. 이그나티예프는 영국과 프랑스의 대표를 만나 곧이어 겨울이 오면 강물이 얼고 중국 폭도들이 일이날 것이므로 철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군하지 않으면 러시아군을 투입하겠다는 경고는 입에 꺼내지도 않았다. 크림전쟁에서 패배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는 영불 연합군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스믈여덟 살 젊은 외교관이 보여준 교활함은 영국과 프랑스군이 철군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그나티예프는 자신의 중재 덕분에 외국군이 철수했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공친왕에게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중국 외교를 총괄하던 공친왕의 판단 착오가 큰 손실을 초래한 것이다. 역으로 러시아 젊은이의 외교적 책략이 먹혀 들어간 것이다. 러시아는 영불 연합군과 청나라와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총알 하나, 피 한방울 소모하지 않고 거대한 땅덩어리를 얻게 되었다.

중국은 이 땅을 동북실지(東北失地)라고 표현한다.

 


<참고자료>

Wikipedia, Treaty of Aigun

Wikipedia, Yishan (official)

Wikipedia, Nikolay Muravyov-Amur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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