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강 동쪽 64개 마을의 대학살(1900)
아무르강 동쪽 64개 마을의 대학살(1900)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8.3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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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는 러시아, 국적은 중국인…의화단운동 직후 러시아의 추방령

 

아무르강은 중국 북만주와 러시아 시베리아 사이를 흐르며 두 나라의 국경을 형성한다. 이 강은 중국에서 헤이룽장(黑龍江)이라 한다. 아무르강과 제야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64개의 마을이 있었다. 청나라 말기에 이곳에는 국경수비대가 농사를 지으면서 병력에 동원되도록 둔전(屯田)을 일구던 곳이다. 아무르강(黑龍江)과 제야강(结雅河)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이 병영촌락을 강동육십사둔(江東六十四屯)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의 사연은 18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의 이르쿠츠크 총독 니콜라이 무라비예프와 청나라 흑룡강 장군 이샨이 아이훈에서 조약을 체결하면서 아무르강을 경계로 좌측(북쪽)은 러시아, 우측(남쪽)은 중국 땅으로 정리했다. 다만 아이훈 건너편에 있는 64개의 중국인 둔전은 러시아 영토에 포함되지만, 주민은 청나라 신민으로서 현지의 재산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별도조항으로 규정했다.

 

강동육십사둔의 위치 /위키피디아
강동육십사둔의 위치 /위키피디아

 

강동육십사둔은 지금의 중국 헤이허(黑河)시와 러시아의 블라고베시첸스크시 사이에 위치하며, 현재 러시아의 아무르주에 속해 있다. 총면적은 3,600으로, 제주도의 2배에 해당한다.

영토는 러시아, 주민과 재산은 중국의 소유라는 이중적 지위는 처음에 별 문제없이 유지되었다. 러시아 영토에서 중국인들의 지위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인구도 늘어났다. 1859년 강동육십사둔의 인구가 3,000명이었으나, 1870년엔 1646명으로 증가했다. 한족 5,400, 만주족 4,500, 퉁그스계열의 다우르족이 1,000명을 헤아렸다. 1894년엔 총인구 16,102명으로 불어났는데, 한족 9,119, 만주족 5,783, 다우르족 1,200명으로 구분되었다. 원주민인 만주족과 다우르족에 비해 한족의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한 것은 중국인에 대한 러시아의 대우가 비교적 원만했다는 증거였다.

 

강동육십사둔 /바이두백과
강동육십사둔 /바이두백과

 

하지만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며 터지며 상황이 반전했다. 중국인들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에 맞서 일어났다.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건 의화단 폭도들은 외국 공사관을 점거하고 반기독교 운동을 벌였다. 러시아인과 그리스정교 신도들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피해를 입었다.

국경지대에도 의화단의 공격이 격화되었다. 아이훈 근처 아무르강을 통행하던 러시아 상선이 의화단에 의해 발이 묶였고, 중국인 마적단 홍호자(紅鬍子)가 러시아 영토인 아무르주 수도 블라고베시첸스크를 습격했다.

아무르지역의 러시아군 책임자는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그리프스키(Konstantin Nikolaevich Gribskii) 중장이었다. 장군은 아무르강 건너 러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중국인을 모두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외가 없었다. 러시아 땅이 되기 이전에 64개 둔전에 살던 원주민이든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일하러 온 노동자든 중국인이면 모두 소집되었다. 당시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통계는 전해지는 게 없다. 당시 아무르주의 전체인구는 3만명이었는데, 그중 중국인이 적게는 6분의1, 많게는 절반에 이르렀다고 추정될 뿐이다.

러시아 군인들은 그 많은 중국인을 아무르강으로 데려려가 그리고 건너가라고 했다. 총칼로 위협했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 건나가다가 되돌아오는 사람에겐 총탄이 날아갔다. 이 집단학살이 벌어진 시기는 190074일에서 8일까지 닷새간이었다. 중국인 8,000명 정도가 끌려온 것으로 추정되며, 죽은 사람만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성이건 아이이건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총칼의 위협 아래 세차게 흐르는 아무르강을 건너야 했다. 강물에는 시체로 가득찼다고 당시 학살에 참여한 러시아 군인이 전했다.

학살이 끝나고, 살아남은 중국인들은 러시아에 대한 복수에 가담했다. 의화단 사건 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마적단은 1만여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그후 러일전쟁(1904~1905)에서 일본 편을 들었다. 일본군은 중국인들의 적개심을 러시아를 제압하는데 활용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러시아군이 강동육십사둔의 중국인들을 처형장으로 끌고가는 모습 /위키피디아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러시아군이 강동육십사둔의 중국인들을 처형장으로 끌고가는 모습 /위키피디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화민국은 강동육십사둔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쫓겨간 이후 196932일 우수리 강의 전바오 섬(珍寶島)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 소련 사이에 군사충돌이 발생했으며 911일까지 계속됐다. 1991511일 중공(中共)정권은 강동육십사둔을 러시아영토임을 인정, 오랫동안 주장해온 영유권을 포기했다. 하지만 중화민국을 계승한 대만정부는 아직도 헤이룽장 동쪽의 땅을 중국령이라고 주장한다.

 


<참고자료>

Wikipedia, Sixty-Four Villages East of the River

Wikipedia, 1900 Amur anti-Chinese pogr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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