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여진족 마을, 재가승촌 아시나요
함경도 여진족 마을, 재가승촌 아시나요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3 13:54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에 귀순해 두만강 일대에서 독특한 풍습 유지…북한에 의해 동화

 

시인 김동환(金東煥, 1901~미상)은 함경북도 경성군 금성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그곳에서 자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그의 국경의 밤은 국경지대 두만강변 작은 마을에서 얻은 정서와 강한 낭만성, 향토적 느낌을 주고 있다. 그 시의 여주인공인 순이는 재가승 집안의 딸로 등장한다.

김동환의 국경의 밤에 나오는 재가승(在家僧)이란 족속의 뿌리는 바로 여진족이다.

재가승이란 말의 원뜻은 아내를 얻어 사는, 즉 가정을 가진 승려를 말한다. 함경북도 재가승 마을 주민들은 불교를 바탕으로 생활을 했으며, 불교에 능숙한 사람을 촌장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래서 재가승 마을은 중골이라고도 했다. 이들은 두만강 함경산북 북쪽 골짜기에 모여 살면서 화전을 일구며 살아갔다.

그들의 유래에 대해선 고려시대 여진 정벌 후 잔류한 원주민들이 부락을 이루어 살면서 시작되었다는 설 병자호란 후 청에 대한 조공을 위해 여진족들을 뽑아 한 마을에 살게 했다는 설이 있다.

일제 때인 1935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재가승 인구는 당시 563, 3,323명명이었다. 가장 많이 분포한 곳은 함경북도 회령군 창두면 종암동, 그리고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월파동이었다.

조선초기 두만강 유역에 살던 여진족 부족은 울량합(兀良哈, 우량하이), 울적합(兀狄哈, 우디거), 오도리(斡都里) 등이었다. 세종대왕이 여진족으로 몰아내고 이 곳에 6진을 설치했다. 울량합·오도리의 일부는 두만강 남쪽의 경원·온성·회령 등의 성밖에 살면서 조선에 귀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들은 차츰 조선 사람으로 동화되어 후대에 재가승으로 불렸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이들은 우리민족과 다른 독특한 풍습을 유지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대산귀(大山鬼)라는 풍습이다.

마을에 병자가 생겨 무당에게 점을 쳤을 때, 귀신의 탈이 났다고 하면,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대대적인 대산귀를 차린다. 비용을 많이 들여 쌀과 돼지, 송아지를 마련하고, 일년에 한두 번 정도 대산귀를 거행했다. 제사를 지낼 때, 하천 가까운 곳에 깨끗한 빈 터를 선택하여 높은 다락을 세 계단으로 만든다.

그 중앙에 장대를 세워 귀신 이름(神名)을 쓴 크고 기다란 천을 매달고, 2030그릇을 차린 다음 무당 23명을 데려다가 밤을 새워 굿을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의무적으로 동원되어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늦게 돼지를 잡아 고기를 올리고 다시 굿을 하면 저녁이 되어야 끝났다. 굿을 하는 중간에 몇 번 점을 쳐 보고 굿이 잘 되지 않으면, 돼지 대신 소를 잡기도 한다. 대산귀가 끝난 다음에는 우선 복술의 집에 떡과 고기를 보내고, 가가호호 떡과 고기를 분배한다.

1년에 두 번 산치성(부군치성)에서 제사를 올리고, 연중 4번 올리는 산제가 있었다. 대체로 마을 사람들끼리 결혼을 했으며, 외지인들이 그들과 혼인할 때에는 그들 마을에 와서 살아야 했다. 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성인남자는 참여하지 않고 여자와 아이들이 지냈으며 지낼 때에는 붉은 옷을 입었다.

 

재가승들은 특수한 족속으로 취급받아 천민 생활을 했다. 소설가 강경애(1907~1943)의 수필 두만강 예찬에서는 재가승들이 억압을 받고 살았다고 묘사됐다.

 

세종왕은 신하인 김종서를 이 지방에 보내어 여진족을 토벌한 후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정하였다. 그 전에는 회령에서 청진까지 일직선을 그어 이남이 조선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두만강이 국경이 되었다.

당시에 여진족은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할 압박을 받으며 죽지 못하여 살았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권력자 앞에 그들의 생명은 풍전등화였다. 불교를 강제로 믿게 하는데 너희들은 가족을 데리고 집에서 믿어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산에서 믿는 불교를 집에서 믿게 되었다. 이른바 재가승(在家僧)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재가승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산간으로 도피해 화전을 일구어 주로 귀리를 생산했다. 남자는 종이를 제조하고 여자는 길쌈을 하며 농사도 겸했다.

귀리를 이용해 황지(黃紙)를 생산했다. 황지란 귀리로 만든 종이를 말한다. 귀리는 추운 지방에서 재배되는데, 재가승들은 이 황지 바치는 것으로 세금을 대신했다. 일제시대엔 목탄 제조와 산나물 채취를 주업으로 하기도 했다.

장래 풍습은 원래는 화장이었지만, 이후 현지 풍습을 받아들여 매장도 했다.

언어는 한국어의 하위 방언으로, 동북 방언 및 육진 방언을 구사했다. 특이한 어휘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나물을 '나마리', 떡고물을 '영에', 지각없다는 말을 '덕새(양소래)없다'고 했다. 호환(虎患, 호랑이에게 당하는 재난)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범이야범이야'라는 말은 욕설이었다.

조상 및 부모의 제사도 장남이 도맡은 것이 아니라 형제끼리 분배했다. 분가할 때 재산을 평등하게 분할했고, 제사도 나누어 주었다.

여자들은 남자와 같이 바지를 입었으며, 저고리를 짧게 하고, 저고리와 바지 사이에는 너비 약 30정도의 허리띠를 매어 젖가슴이 크게 노출되었다. 아이들은 돼지 어금니 두 개를 마주 붙여 색실로 감아올린 호신부(護身符)를 지녔다.

식생활은 산간지방과 승려의 풍습에 영향을 받아 잡곡과 산채 등을 주로 먹었지만 특별한 날에는 육식을 했다. 주택은 큰 방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주택의 주위에 울타리는 만들었지만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주위에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재가승촌은 일제시대와 해방초까지 조선에 동화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후 강제로 동화되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아일보가 19351130일자부터 4회에 걸쳐 게제한 재가승만고(在家僧漫考) 연재물에서 일제강점기인 1935년 함경북도 재가승 인구는 총 5633,323명였다. 주요 거주지는 함경북도 부령군 부령면 허통동 19112부령군 석막면 금강동 42175회령군 팔을면 영천동 47285▲〃 창두면 무산동 70421▲〃 〃 풍산동 18126▲〃 〃 영산동 1073회령군 창두면 창태동 55385▲〃 〃 종암동 92684▲〃 〃 어운동 68298회령군 벽성면 대덕동 30108종성군 풍곡면 풍계동 사동 28154온성군 상포면 풍판동 오제동 852▲〃 미포면 월파동 영월사 53309▲〃 〃 풍교동 제봉 1065▲〃 온성면 주원동 구암 313경흥군 상하면 송상동 보현곡 1063명이다. (아래 기사 참조)

 

<참고> 동아일보 재가승만고(在家僧漫考), 19351130일자부터 4회 연재

 

대구 출신의 문학자 이재욱은 19351130일자부터 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재가승에 대한 글을 실었다. 제목은 재가승만고다. 한국의 소수민족인 재가승에 대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 머리말 >

 

現今 鴨綠 豆滿兩江南岸 卽北朝鮮六鎭故地山間地方在家僧이라는 一種特殊部落散在하여 原始的生活營爲하고 잇다는것은 너무나有名事實이나 그所謂在家僧由來하여는筆者의아는아즉定說이 없다. 從來學界에잇어서나 市井에잇어서나 主張或傳說이 없지아니하며 또 이 問題하여 相當關心을 가지엿는데도 不拘하고 아직까지 그正體究明하지못하엿다는 事實하여는 學界하여 遺憾事라 아니할수없다. 이러한 意味下에서 簡粗, 無頭緖不無하나 在家僧하여 若干論述하여 諸賢參考하고저한다.

 

, 北朝鮮史的槪觀

지금 在家僧居住하는 咸鏡道一帶地方古代에잇어서는 現今咸興一帶東沃沮, 咸鏡道豆滿江沿岸一帶北沃沮根據地엿다. 그다음 三國時代에 들어와서는 高句麗興起하여 그故地高句麗領有하는바가되엇으며 新羅眞興王時代에잇어서는 咸興北方黃草嶺以南地區新羅勢力範圍內에 들어갓다. 其後 渤海國興起하여 新羅北境侵犯하엿고 이어서 契丹()建國되여 鴨綠江, 豆滿江北方一帶領有하게되자 女眞族은 그窟穴喪失하고 大擧豆滿江沿岸避難하여 今日咸鏡南道占據하엿다. 그다음 高麗, 李朝時代에 잇어서의 情勢는 어떠하엿을까.

高麗半島[2]하엿으나 그北境終始女眞族侵犯을 받엇고 따라서 睿宗二年元帥尹瓘, 副元帥吳延寵十七萬大軍을 거느리고가 女眞大破하고 拓地定界하여 英州, 雄州, 福州, 吉州, 咸州, 公嶮鎭, 宜州, 通泰, 平戎等九城新築하여 徹底的으로肅淸工作斷行하엿다. 肅淸工作成功記念하기하여 其後, 北靑에는 萬賴祠, 利原에는 侍中臺, 鏡城에는 元帥臺, 慶興에는 征北祠設置하여 春秋祭祠繼續하여온다고 한다. 如斯從來, 北境一帶蟠居하여 邊民을 괴롭게하는 女眞族은 그根據地喪失하는等 高麗에게 徹底的掃蕩하엿음에도不拘하고 女眞族依然連歲來侵하여 北境情勢騷亂케 하엿다. 그러므로 高麗時代에잇어서는 今日咸鏡道一帶高麗, 女眞爭奪地化하엿고 따라서 今日咸興以北地區結局 女眞族巢窟化하엿다고 보는便穩當觀察이라 하겟다. 다음 李朝에들어와서는 國初北境一帶孔鍾吉等七州設置以後北境一帶形式上 朝鮮領有하엿으나 女眞族入寇[3]依然不絶하엿음으로 世宗十六年金宗瑞咸吉道觀察使하고 國境一帶慶源, 會寧, 鍾城, 穩城, 慶興, 富寧等六鎭設置하여 防禦完璧하엿다. 그러나 淸太祖鴨綠, 豆滿兩江北境平定하자, 女眞族은다시 하여 大擧半島北境殺到하여 國境地方又復그들의侵寇를받으나 未久淸太祖支那中原進出함을따라 女眞族과의紛爭大端緩和되어 國境情勢小康保持하엿다. 이제 萬機要覽記錄하여 高麗, 李朝時代에 잇어서의 北境地方情勢一般總括的으로 推測할수 잇다고 믿는다.

卽 萬機要覽 六鎭開拓條宗瑞密爲書以啓曰, 高麗始祖力能統[4]合三韓, 威不及於朔方, 只以鐵嶺爲界, 其在睿宗, 謀臣騁[5], 誘翦[6][7], 遂置九城, 然旋[8]得旋失이라하엿고 그다음에 『…世宗壬子, 兀狄哈攻斡木河[9]殺管禿父子, 其黨凡察反伊[10], [11]塞願處慶源近地, 不許, 敎兵曹曰, 我國北界豆滿江, 太祖始置慶源府于孔州, 太宗移府治于蘇多老, 皆所[12]以重肇基之地也於是, 以金宗瑞爲咸吉道觀察使, 設置慶興, 會寧, 鍾城, 穩城, 慶源, 富寧, 築城實民, 凡六年而鎭之[13]라하여 這間消息하고잇다.

 

, 由來

今日, 咸鏡北道邊境一帶居住하는, 所謂 在家僧一便 僧侶行世를하면서 一便 俗人과같은 生活營爲하며, 蓄妻鞠子한다는 것은 周知하는바이어니와, 李能和氏朝鮮佛敎通史에서 在家僧하여, 다음과같이 말하엿다

海東僧史, 有一奇事, 卽 北邊之在家僧是, 蓄妻食肉, 俱爲無碍, 可謂朝鮮之眞宗也, 咸鏡北道慶興, 慶源, 會寧, 富寧, 鏡城, 穩城等沿邊各郡, 特有一種僧侶, 群聚居生于山谷中, 自成村落, 其所居村落名山門, 必有公共佛殿一處, 婚喪之禮, 行於寺, 號曰在家僧, 血脈法脈, 兩俱相續, 以別良俗, 不令雜處, 劃定村落, 使有增殖……』이라 하여 大略 在家僧하여 論述하엿고, 由來하여는 高麗圖經所說左袒하엿다. 그러나, 由來問題하여는 學界에잇어서는 尙今結論을 얻지못하엿고 各其蓋然的所見披瀝하는 程度를 지나치지못하고잇는現狀이다. 從來로 이由來問題하여는 大體三說流布되고잇으니 그것은 奴隸說(僧軍說), 僧侶說, 藩胡說인것이다. 勿論 主從을 달리하는程度에 지나지못하고 그根本問題種族問題하여는 女眞族大體歸一하는듯도하나 이나 各其所說根據薄弱하야信憑할만한決論을 얻기에는 아직前途遼遠이라 아니할수없다. 只今左[1]各說紹介檢討하고저한다.

 

, 奴隸說(僧軍說)

첫재, 在家僧由來하여, 世間하는所謂 僧侶說, 藩胡說以外, 徐兢所謂奴隸說紹介하려고 한다. 그의, 高麗圖經하면,

在家和尙, 不服袈裟, 不持[2]戒律, 白紵窄[3], 束腰皁帛, 徒跣以行, 間有穿履者, 自爲居[4], 娶婦鞠子, 其於公上, 負載器用, 掃除道路, 開治溝洫, 修築城室, 悉以從事, 邊陲[5]有警, 則團結而出, 雖不閑於馳逐[6], 然頗壯勇[7], 其趨軍旅之事, 則人自褁糧[8], 故國用不費而能戰也, 聞中間契丹爲麗人所敗, 正賴此輩, 其實刑餘之役人, 夷人以其髡削鬚髮而名和尙耳.라 하여 所謂, 在家僧袈裟를 입지아니하고, 戒律을 가지지아니하며, 邊境에서軍務하여, 所謂屯田兵[9]種類의 것임을말하고 잇는듯하다. 다시말하면, 世間에서, 特殊階級在家和尙이라 指稱함에한 그根據가 그들이鬚髮髡削함에잇으나, 은 그들이 刑餘之役人, 階級在家和尙이라함은 틀림없이 誤謬見解라고 보고잇는듯 하다.

그다음, 李能和氏在家僧由來一說로서 그著 朝鮮佛敎通史에서 世間에서는 이在家僧由來, 仁祖十四年勃發淸兵入寇[10], , 丙子胡亂때에, 淸兵大擧南漢山城攻圍하여 四十五日만에 媾和解圍故事關聯시켜, 當時, 淸國은 그媾和條件로서 朝鮮하여, 要求가잇는 卽時, 大乳人 三千人牝馬三千匹, 寧古塔入送하라는 要求를 하엿음으로, 北邊沿郡居住하는 女眞遺族으로서 이要求計劃樹立, 이를保護하엿고, 現今, 北邊沿郡蟠居하여 一種特殊部落形成하고잇는, 在家僧由來가여긔서 發足하엿다고 하는가잇다고 하엿다. 그러나, 所謂在家僧高麗時代에벌서 邊境에서, 特殊 集團生活營爲하고 잇[11]엇다는 記錄儼然現存하는 以上, 坊間一種俗說에 지나지못할것이다. 그러나, 徐兢刑餘之役人說은 그記錄이오래인, 當時政治的 特殊性吟味한다면, 在家僧由來問題檢討하는限 一顧할만한 이라고 하겟다.

 

, 僧侶說

다음에, 李能和氏, 前揭書에 잇어서, 다시在家僧由來하여 다시一說紹介하엿다. ,

又說, 高麗尹瓘[12]驅逐女眞, 其殘落者造寺院, 以安處之, 使之奉佛, 族居爲僧…』이라하엿다. 只今, 由來所說을보건대女眞邊人僧侶變換시켯다는데, 根據를찾고저하는이다. [13]는그著 淸津府一方面茂山郡會寧郡鍾城郡穩城郡各管內及間島古蹟調査顚末에서

初金宗瑞之驅出女眞也, 其窮不能徒去者, 歸化則斷髮區別之, 旣斷髮則, 屬之寺刹, 謂之在家僧, 戰時則運搬軍需(軍幕等)而在前驅, 平時則, 造黃紙以供官用, 極賤不可與平民同等故, 土豪亦皆以奴隸使之, 諸般討索, 罔有紀極, 距今前西北經略使魚允中, 革袪其賤役, 然慣習猶存故, 官每欲復其身役則, 渠自呼訴于京司, 僅民造紙之役, 然在鄕役不得免焉…』이라하여 女眞遺民政策上 斷髮시켜, 邊境各寺刹分屬시켯다는데서 그由來를찾고저하는이다. 勿論, 女眞遺族僧侶說充分在家僧 由來問題檢討上 對象[14]이될만한 이라하겟으나 이肯定하기까지에는 아즉 相當根據時日하지안흘가한다.

 

, 藩胡說[1]

以上에서 在家僧由來諸說檢討紹介하는 便利上奴隸說, 僧侶說等으로 分立시켜, 各其主要點紹介하엿거니와 當時社會的情勢로보아서 寺刹軍隊想像以上으로 密接關係下에 잇엇음으[2]로 이兩者全然分離하여서 在家僧과의 關係檢討함에는 너무나 無理가잇다고생각한다. 只今 여긔서 紹介檢討하려고하는 藩胡說을말하드래도 이在家僧由來諸說大多數가 그種族問題하여서는 그見解女眞族一致함에도 不拘하고 구태여 여긔서 藩胡說이라는 項目함은 蛇足不無할줄아나 檢討順序上 由來奴隸關係에 잇지아니하고 또 僧侶關係에도 잇지아니한다고 假定한다면 이項目함은 全然無意味하지는아니할것이다. 于先 北路紀略하면

『……或曰在家僧, 惟西北邊境有之, 舊之藩胡所住近處也但以擁髮而居我境故謂之僧耳, 司敎之地, 宜有以變之也, 明川以南始有僧.이라하엿으며 記錄하여서는 藩胡奴隸 或僧侶와의關係到底把握餘地가없고 在家僧正體는 하마알아볼方途가 없다는을준다. 따라서 學徒興味는 더욱더욱眞劍味하는것은 當然歸結이라고 아니할수없다.

以上에서 在家僧由來諸說紹介檢討便利上奴隸說, 僧侶說, 藩胡說大別하여若干紹介한바잇엇거니와 畢竟 正體究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 肯定하여야할事實이다. 그러나 다음의 記錄하여 그由來究明에 잇어서적지아니한 暗示를 얻을 것이다. 北塞紀略(孔州風土記條)하면

山僧多在家, 挾妻食肉, 子孫繼襲爲僧이라하엿고 北路紀略하면,

僧皆在家, [3]妻生子, 食肉飮酒, 謂之在家僧, 世襲爲僧…』이라하엿다. 따라서吾人은그由來卽正體究明에잇어서更一步不無하나 依然五里霧中에서 헤메는이적지아니하다. 그러나最後注意할만한 記錄水原儒生禹夏永, 時務策中에보이는六鎭僧徒議記錄일것이다. 以上諸說과 아울러 考察한다면在家僧由來輪廓이 자못 鮮明해질것이라고 믿는다.

 

六鎭僧徒議하면,

北路豆滿江沿邊六鎭 及三甲列邑 與彼界隔一衣帶而, 水狹灘淺, 間多[4]徒揭之處, 彼我人民, 因其採獵, 潛越往來之弊, 種種難禁, 況且逐年開市, 與彼通貨, 彼人之多年來往於市門者, 能爲我國之言, 對面酬酢, 少無差誤, 但其服着與我有異, 故能辨[5]爲彼人, 今所隱憂者, 彼若換着一白衲潛越我界, 混跡於本國僧徒則, 無以辨[6], 脫有僧俗中不逞之徒, 引入寺刹闌間販貨, 一過沿江之邑則, 雖遍行國中, 孰知其爲彼人也哉, 何況逐利興商彼我人情之所同一, 有邊禁之疎虞則, 潛機轉入固其勢也라하여, 在家僧由來問題檢討上, 적지아니한 示唆를주는 記錄이라하겟다.

컨대 現今北邊群居하는 在家僧은 그種族問題에잇어서는 적어도 女眞遺族이라고보는 것이妥當하다고 믿으며 또 그들이 在家僧이라는 指稱을받으면서 一種特殊部落形成하게되기까지의 過程하여서는 速斷不許하나 女眞族中逐利興商圖謀하는邊境僧侶結託하여 僧侶假裝하여入居하엿다는 事實에서 그由來를 찾을수없을가한다. 그러나 이在家僧由來問題今後學者들의 檢討硏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到底速斷은못할것이다.

 

, 分布俗習

첫재, 北朝鮮에 잇어서의 그들의分布狀況을보건대 前者에 잇어서도 屢說한바와같이 그들은咸鏡道奧地一帶에서 集團生活營爲하고잇으며 그들은 大槪 深山幽谷에 그住家를가지는 關係上, 그들의 人口乃至戶數正確調査至難함은 勿論이다. 그러므로 故今西博士調査報告紹介하려고한다. 그러나 이報告는 그들의 人口乃至戶數全般的調査가 아니며 또 最近調査가아니나마 于先여긔들어 이問題關心을가지는 諸賢參考하고저한다. 컨대 最近에 잇어서는 그들은 諸般社會的情勢 卽世運進展, 朝鮮內地人과의 交涉等影響으로말미암아 漸次, 朝鮮內地人同化되어가는 傾向이며 今日에잇어서의 純全在家僧主要住居地富平郡下南碩寺, 穩城郡下月下洞, 會寧郡下魯雁洞, 靈山洞等이다. 이제 咸北一帶地方群居하고잇는 在家僧大略다음과같다고 한다.

 

1935년 11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
1935년 11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

 

富寧郡 富寧面 虛通洞 一九戶 一一二人

富寧郡 石幕面 金降洞 四二 一七五

會寧郡 八乙面 靈泉洞 四七 二八五

昌斗面 茂山洞 七四二一

〃 〃 豊山洞 一八 一二六

〃 〃 靈山洞 一七三

會寧郡 昌斗面 蒼苔洞 五五 三八五

〃 〃 鍾岩洞 九二 六八四

〃 〃 漁雲洞 六八 二九八

會寧郡 碧城面 大德洞 三

鍾城郡 豊谷面 豊溪洞 寺洞 二八 一五四

穩城郡 桑浦面 豊判洞 烏啼洞 八 五二

美浦面 月波洞 映月寺 五三 三

〃 〃 豊橋洞 諸峰 一六五

穩城面 周源洞 鳩岩 三 一三

慶興郡 上下面 松上洞 普賢谷 一六三

 

以上在家僧分布大略말한것이요 그後 多少變動이 잇엇다는 充分 諒解하여주기바라는바이외다. 그리고 比較的 最近報告하면 茂山地方一帶에 잇어서는 그數爻漸次減少하여지고 그勢力逐年衰弱一路를 밟는다고 한다.

다음에는 그들의 習俗하여 그大綱을 말한다면 그들은 職業으로서는 農業(火田)爲主하나 그居所山嶽重疊深山幽谷하는關係上 土地狹小하고 또地味瘠薄하여 豊足生活到底期待할수 없는 狀態이다. 그리고 平時에는 黃紙製造하여 公私 文書用한다. 그리고 그들은 社會的 地位最下階級하며 一般平民과의 通婚勿論 甚至於 交際까지못하는 狀態이다. 各其家庭에는 佛像佛具가없고 [1]只 部落外寺院建立하여 各其守護한다. 그들의 衣服制度는 어떠할까? 그들은 婦女子裝身具, 衣服貌樣等距今約三十年前朝鮮內地人婦女子의그것에 恰似하다고 한다. 食事僧侶行世를하면서도 肉食不禁하며 그住居深山幽谷하는 은그들의 어느部落에가든지 第一눈에먼첨뜨이는事實이라한다.

이제 冠婚喪祭儀式에잇어서 그들의習俗을 살펴보기로하자. 그들은 冠婚喪祭場所에는 招請有無勿論하고 全家族參席한다고한다. 따라서 欽定滿洲源流考에보이는,

 

女眞飮宴, 賓客盡携親友而來, 相近之家, 不召皆至…』라한 이記錄, 在家僧女眞族由來說에만흔興味함을알겟다. 只今 冠婚習俗하여, 于先 말한다면 在家僧自己以外他族과는絶對通婚을하지아니하고 嫁娶時에는 牛馬使用한다고한다.

또 그다음 喪祭習俗을보건댄 一律火葬을하며 그遺骨은 그것을粉碎하며 五方散布하며 人間은죽으면 靈魂釋尊側近歸依하는것이라고 確信하는 關係이라고한다.

그다음 이在家僧習俗하여 金基哲氏는 그의關北大觀에서 詳細論述한바잇거니와 只今 大要紹介한다면 다음과같다. 記錄하여, 在家僧由來와 그들의 日常生活全貌가 더욱 鮮明化할 것이다.

, 그들은元來, 女眞族歸順種族이라하야, 一般이 그들을 奴隸視하며, 그들은 部落全體共同寺刹建設하여, 部落全體奉祀하나, 佛經하는 없고, [3]只 佛前禮拜할뿐이며, 그들은元來, 姓名을 가지지아니 하엿으나, 近來에는, 任意姓名을 지여 使用하며, , 在家僧僧軍이라고하는 傳說이잇으나, 何等實蹟이없고, 武器를가진 形跡도없다한다. , 在家僧音聲姿態朝鮮內地人과달너, 逃亡極難하다하며, 住居入口에는 반드시 石墻한다. 이것은 他部落區別함이그目的이며, 萬一區域을 넘어서 居住하면, 朝鮮內地兩班에게, 捕獲되어, 奴隸가되는 事實等紹介하엿다.

 

, 結言

以上에 잇어서, 朝鮮北境一帶蟠居하여, 一種特殊階級으로서時代風潮超越하고, , 原始的生活營爲하고잇는 在家僧하여, 所見一端披瀝하엿으나, 現在에잇어서는, 아즉 그正體[4] 究明斷定何等根據가 없는, 斷案保留하거니와, 자못, 北境에 이러한 特殊部落存在하여, 어떠한意味에잇어서나, 問題朝鮮學徒當面重要硏究對象[5]의 하나임을 알어두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最後, 在家僧槪括的私見披瀝하여둔다. , 在家僧은 그種族問題에 잇어서는 女眞遺族이라고보고십흐며, 그들이 今日과같은生活營爲하며, 在家僧이라는 指稱을받는 動機하여는, 逐利興商圖謀하는 女眞人이 그利害關係上, 北境列邑僧徒結託하여, 官憲監視하고저 하엿는데, 原因을 차즐수가 없을가생각한다.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지나다 2024-03-20 21:26:40
1973년 뉴스에 조목조목 반박해 놓았더군요. 오래전부터 (대략 고려시대 정도로 추정) 변방에 죄인들을 끌어모아서, 변방을 지키게 했습니다. 마을은 불교와 별로 관련이 없고, 불교는 공동으로 모이는 사당 정도가 전부이고, 굿을 하는 샤머니즘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말은 함경도 방언에 가까웠고, 함경도 방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