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콘스탄티노플 꿈꾸는 블라디보스톡
태평양의 콘스탄티노플 꿈꾸는 블라디보스톡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9.0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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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항 추구의 꿈 실현한 곳…자유항, 경제특구 선언으로 국제도시 지향

 

블라디보스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러시아의 도시다. 함경북도 나진시에서 140km에 불과하며, 동해 바다를 통해 부산 울산 동해의 우리 항구도시와 연결된다. 서울에서 거리는 740km로 베이징 950km, 도쿄 1,065km보다 가깝다. 비행기로 가면 서울에서 한시간 거리에 있다.

160여년전인 1860, 이 곳이 러시아 땅이 되기 이전에는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다. 부동항을 찾아 남진정책을 밀어붙이던 러시아제국은 마침내 태평양 연안에서 겨울에도 얼지 않은 항구(不凍港)를 갖게 되었다. 동아시아 몬순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베리아에서 가장 따듯한 곳이다. 한겨울에 영하 20°C까지 내려가지만 북쪽의 오호츠크나, 아무르강 하구인 니콜라예프스크에 비해선 상당히 포근한 곳이다. 겨울에 내리는 눈도 그다지 많지 않다. 시베리아의 폭풍한설에 시달리던 러시아인들이 블라디보스톡을 발견하곤 동양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라고 했다.

1859년 아무르스키 백작의 호칭을 얻은 이르쿠츠크 총독 니콜라이 무라비요프는 이 일대를 탐사한 후 지형적으로 이스탄불과 닮은데 경탄했다. 육지 안으로 길쭉하게 들어온 만(bay)은 이스탄불의 골든혼(Golden Horn)과 비슷하고 루스키 섬으로 인해 생긴 해협은 보스포루스 해협에 비견되었다. 무라비요프는 이스탄불의 지명을 따서 이곳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콘스틴타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을 동로마의 수도로 건설했듯이 이 곳에서 러시아 제국의 동방 거점을 구축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블라디보스톡이란 이름은 무라비요프가 이곳을 다녀간 때부터 생겼다. Vlad(to rule)Vostok(east)을 합쳐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을 도시 이름에 새겼다.

 

블라디보스톡 골든혼베이(금각만)의 전경(2014) /위키피디아
블라디보스톡 골든혼베이(금각만)의 전경(2014) /위키피디아

 

블라디보스톡은 애당초 러시아 극동함대의 군항으로 개발되었다. 겨울철에 항구 안이 다소 결빙하지만, 쇄빙선을 사용하면 항구 운영이 1년 내내 중단되지 않는다. 동방과 태평양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은 군항을 필요로 했다.

블라디보스톡은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극항로의 종점이며,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종점이다. 븍극항로가 이제 활용 초기단계라면 블라디보스톡의 성장잠재력은 크다.

인구는 60만명으로 러시아 도시 가운데 22번째이며, 하바로프스크(57만명)와 함께 극동러시아의 양대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은 프리모르스키 주의 수도인데, 러시아어 프리모르스키(Primorsky)가 연안(littoral, coastal)이란 의미여서 우리나라에선 연해주라고 부른다.

 

블라디보스톡 항 /위키피디아
블라디보스톡 항 /위키피디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발해의 솔빈부(率賓府)에 속해 있었다. 인근 니콜라예프카, 고르바트카 등지에는 발해 성터에서 8~10세기의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 . 원의 변방이었고, 청조에서는 해삼이 잘 잡히는 어촌이란 뜻으로 해삼외(海參崴)라고 했다.

해삼을 잡던 한적한 어촌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860년 러시아 영토가 된 이후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 골든혼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태평양의 거점 군항으로 삼았다. 러시아인 최초의 정착자 야코프 라자레비치 세묘노프(Yakov Lazarevich Semyonov)186110월 에 가족과 함께 이사를 왔고, 이듬해 1862년에 최초의 토지매매가 이뤄졌다.

조선인도 러시아인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블라디보스톡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863년 함경북도 출신의 13호 농가가 노브고로드만으로 이주했고, 50년후 그 수가 20만명을 넘어섰다. 당시 한양 인구에 버금가는 숫자였다. 한인인구가 많아 지면서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톡이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 되었다. 하지만 1911년 콜레라 전염병이 돌자 러시아가 조선인을 이주시켰고,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극동러시아에서 독립군들이 근거지를 잃게 되었다. 1937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열차로 카자흐스탄 또는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강제이주되었다. 이후 한인동포사회는 소멸되다시피 했고, 현재 블라디보스톡의 한인은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기준 블라디보스톡의 인구는 러시아인이 92.4%, 우크라이나인 2%, 우즈백인 1.4%이며, 한인은 0.8%로 집계되었다.

 

​시베리아철도의 종점인 블라디보스톡 역 /위키피디아​
​시베리아철도의 종점인 블라디보스톡 역 /위키피디아​

 

블라디보스톡은 1880년 도시로 격상되었다. 20세기초에 모스크바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19185월에 체코 군단이 시베리아철도를 타고와 블라디보스톡을 장악했고, 이어 러시아 내전에 연합군이 참전, 블라디보스톡을 미국과 일본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이후 백군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프리아무르 임시정부를 수립, 블라디보스톡을 수도로 삼았으나, 1922년 볼셰비키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블라디보스톡은 소련 시절 공식적으로 외국인의 방문이 허용디지 않는 폐쇄 도시였으나, 소련 해체 이후 2012년 러시아는 이곳 러스키섬에서 제24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정상회의에 대비해 러시아 정부는 블라디보스톡 국제공항을 현대화하고 휴양지, 식당, 오락시설 등을 갖췄으며 거대한 사장교 2개도 건설했다.

2015,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블라디보스톡을 자유항으로 선포하고, 경제특구를 설치했다. 이 해부터 블라디보스톡에서 동방경제포럼이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

영화배우 율 브리너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태어났던 집 앞에 그의 석상이 서 있다.

 

졸로토이 대교와 금각만의 야경 /위키피디아
졸로토이 대교와 금각만의 야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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