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과 왕비, 동양과 서양의 개념 차이
여왕과 왕비, 동양과 서양의 개념 차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9.1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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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와 왕의 부인의 개념 혼동…성리학과 기독교, 종족 전통의 차이

 

외국 왕실의 용어를 번역할 때 혼동이 빚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나라의 왕정은 조선시대에 끝났고, 과거 왕실의 용어를 영국 등 왕정이 유지되는 나라의 용어에 정확하게 대입하기 힘들다. 문화와 역사가 다른 탓이기도 하다. 가장 헷갈리는 단어중 하나가 Queen이다. 며칠전에 서거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경우와 새로 왕비가 된 커밀라에게도 같은 단어인 Queen이란 호칭을 붙였다.

Queen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King)의 여성형이란 의미와 왕의 부인이란 의미다. 공식용어로 여왕은 Queen regnant이고, 왕비는 Queen consort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전자는 지배자 여왕, 후자는 배우자 왕비가 된다. 요즘 영국 언론들은 왕비가 된 커밀라를 전왕인 엘리자베스 2세와 구분하기 위해 Queen consort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가면 커밀라에게도 줄여서 Queen이라고 할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커밀라(2012년) /위키피디아
엘리자베스 여왕과 커밀라(2012년) /위키피디아

 

영국 역사에서 왕비(Queen consort)는 남편이 왕(King)이 되면 당연하게 부여받는 지위였다. 하지만 영국에선 찰스 3세 국왕의 첫부인인 다이애나 스펜서에 대한 국민적 애정이 남아 있는데다 다이애나 사망 전에 찰스 왕세자와 커밀라 사이에 불륜관계에 있었다는 소문이 돌아 그녀를 왕비로 부르는데 거리낌이 있었다. 이런 불편함을 정리한 것이 엘리자베스 2세였다. 여왕은 올해 2월에 찰스가 왕위에 오르면 그의 아내인 커밀라 파커 볼스가 왕비 칭호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찰스 3세는 1981년 첫 번째 부인인 다이애나 스펜서와 결혼했고, 다이애나의 호칭은 웨일스 공빈(Princess of Wales)였다. 다이애나가 1997년 차량사고로 사망하고, 찰스 왕세자는 2005년에 커밀라와 결혼했다. 커밀라의 공식호칭은 빈(Princess)가 아닌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커밀라는 남편이 왕이 되더라도 왕비가 되지 못하고 ’(Princess Consort)이란 칭호를 쓰게 될 전망이었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올초 즉위 70주년 행사에서 자신이 죽으면 새 며느리를 왕비로 올리라고 한 것이다.

20세기 이후 영국에는 조지 5세와 조지 6세의 왕비 메리와 알렉산드라 2명이 있었고, 이번에 커밀라가 왕비가 됨으로써 영국 왕실에 70년만에 왕비를 맞게 된 것이다. 1066년 이후 영국에는 41명의 군주가 재위했는데, 이중 여왕은 메리 1, 엘리자베스 1, 메리 2, , 빅토리아, 엘리자베스 2세 등 6명이 있었다.

 

커밀라 영국 왕비 /위키피디아
커밀라 영국 왕비 /위키피디아

 

우리 역사에서는 신라시대에 선덕, 진덕, 진성 세명의 여왕이 있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여왕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왕(善德王), 진덕왕(眞德王), 진성왕(眞聖王)이라고 썼다. 특히 선덕왕에 대해 같은 발음의 또다른 선덕왕(宣德王)과 구분하기 위해 여왕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한자의 차이로 구분했다. 성리학자였던 김부식은 왕과 여왕을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삼국사기보다 140여년 후에 나온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은 여대왕(女大王)이란 표현을 썼다. 일연스님은 민간에서 오가는 설화를 많이 옮기는 과정에서 당시 백성들이 여왕이라 표현한데 주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초기 신라왕실에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는데 선덕과 진덕은 성골 남자 가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여성으로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었다. 진덕왕으로 성골 계통이 끊어지고 진골 남성 중 유력자였던 김춘추가 왕위를 이었으니, 태종 무열왕이다.

신라 후대에 들어 47대 헌안왕이 아들이 없고 딸만 둘 있어 여왕을 올리자는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헌안왕은 유교적 관점에서 여자를 왕에 올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므로, 왕족 중에서 김응렴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이었으니, 경문왕이다. 이때 헌안왕이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유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임금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과인은 불행하게도 아들이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나라 옛 일에 선덕(善德)과 진덕(眞德)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가까운 일이라 본받을 수는 없다. 사위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노련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대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祖宗)의 훌륭한 후계자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나라에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곧이어 임금이 돌아가셨다.

 

51대 진성왕은 오빠인 정강왕에게서 왕위를 넘겨 받았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정강왕은 병이 들어 신하에게 말했다. “나의 병이 위독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장부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善德王)과 진덕왕(眞德王)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

진성왕은 집권후 실정을 거듭했다. 각간 위홍(魏弘)과 정을 통하고, 젊은 미남 두세 명을 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이 때문에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과 벌이 공정하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후 신라에서 여왕은 등장하지 않았다. 신라 후기에 들어 유학의 풍토가 뿌리깊게 내린 것이다.

 

중국 역사에는 측천무후 1명만 여황제였으나, 측천이 죽을 때 자신을 황제로 기록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 공식적으로는 여제가 1명도 없다. 일본에서는 8명의 여성군주가 나왔다.

 

서양에서는 여성에게 국왕과 귀족, 재산의 대물림을 허용한데 비해, 동양에서는 남성 가계로 대를 잇고 왕위와 신분, 재산을 이어갔다. 동양에는 유교 사상이 지배한 반면에 서양에선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서양에선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아 군주의 아들이 없을 때 모자 계승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국가에 따라 여성 즉위를 막는 살리카 법이 존재했는데, 이 법이 적용되는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여왕이 없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List of women rulers

Wikipedia, Queen regnant

Wikipedia, Camilla, Queen consort of the United Kingdom

나무위키,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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