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뱃길③…패전후 오키나와로 갔을까
삼별초 뱃길③…패전후 오키나와로 갔을까
  • 아틀라스
  • 승인 2019.06.24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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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이동설 증거…삼별초 패전기인 ‘계유년’ 표현, 다수의 고려 문화

 

고려 원종 14(1273) 4월에 여몽 연합군은 제주를 공격해 김통정(金通精)이 이끄는 삼별초(三別抄)를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잡힌 포로가 1,300명으로 기록이 전한다. 제주의 싸움에서 삼별초는 모두 섬멸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제주에서 살아남은 일부 세력과 전라도와 경상도에 활동하던 또 다른 별초의 세력들은 신세계을 찾아 갔다고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들이 패전후 찾아간 곳이 오키나와(沖繩)의 류큐국(琉球國)이라는 설이다.

 

고대해양탐험연구소장이자, 시인인 채바다씨는 삼별초의 류큐국 이동설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의 지론을 요약한다.

그는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이전했다는 배경을 두가지로 설명한다.

그 첫째는 1955년에 오키나와현, 우라소에(浦添)에서 출토된 기와에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다)라고 한 명문(銘文)이 셔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이 유물은 700여년 시공을 뛰어 넘어 삼별초가 활약한 진도 용장산성과 제주의 항파두리 등지에서 발굴 된 유물과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삼별초의 이동과 발자취를 파악하는데 이 보다 더 명확한 물증이 없다는 채바다씨의 주장이다.

고려는 베트남, 인도, 아라비아해까지 진출하는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을 보유했기 때문에 오키나와는 삼별초가 항해하기에 충분한 거리다. 여몽 연합군의 대공세를 당한 후 삼별초는 제주를 떠나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남진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키나와에 고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우선 오키나와 구스쿠 산성들의 축성, 설계, 디자인들이 한결 같이 고구려와 고려의 성곽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오키나와 여러 곳에 축성된 쿠스쿠 성은 고려의 석공들이 건너와서 쌓은 것처럼 너무나 닮아 있다. 아울러 오키나와인들의 식생활과 어로 방법, 풍습에서도 고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라소에에서 출토된 기와. 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KBS 역사추적 캡쳐
우라소에에서 출토된 기와. 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KBS 역사추적 캡쳐

 

오키나와 유물의 고려풍

20076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열린 '탐라와 유구(琉球·류큐) 왕국' 특별전에는 오키나와현에서 대여해 온 13~14세기 '수막새' 기와가 전시되었다. 특히 1955, 오키나와현 우라소에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다)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계유년은 60년에 한번씩 돌아오는데, 삼별초가 진압된 해인 1273년도 계유년이었다. 혹시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된 삼별초 가운데 일부가 그해 오키나와로 가서 터를 잡은 게 아닐까.

진도 용장산성 수막새에 새겨진 연꽃잎이 8, 오키나와 것이 9개다.

이와 비슷한 년대의 고려기와'는 우라소에성 뿐만 아니라 슈리성(首里城)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되어 오래 전부터 알려지고 있다.

 

오키나와 암키와. 출토 계유년(1273년).으로 표시(사진/ 국립제주박물관
진도 용장산성 출토 수막새(왼쪽)와 오키나와 우라소에 출토 수막새.(사진/ 국립제주박물관)

 

오키나와의 구스크()

오키나와는 13세기부터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여러 곳에 크고 작은 성곽들이 축성되고 있다. 본섬 북부에 45개소, 중부에 65개소, 남부에 113개소 등 300여개가 분포되어 있다.

구스쿠 (グスク)는 성()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구스쿠는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류큐왕국의 대표적인 상징적 유적이다. 원래 일본어로 성은 라고 읽고 오키나와에서만 구스쿠'라고 한다.

오키나와 구스쿠의 성들은 한결 같이 크고 낮은 산등선을 따라 축성 되어 있다. 내부 공간은 평탄면과 굴절 계단형으로 축성되어 있다. 이러한 성곽 축성들은 13세기말부터 14세기 전반으로 알려 지고 있다.

이 곳 성곽들도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병풍상의 곡선을 이루며 축성 하고 있다. 고구려 의 전통으로 알려진 치()와 옹성들을 그대로 본받고 있다. 축성 시기에 사용된 철제 공구와 제작 기술들을 살펴 볼 때 외부로부터 상륙한 경험 있는 축성 기술력을 동원하고 있다. 이곳 원주민들로는 이러한 성곽의 축성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이다.

오키나와 군도에는 360개 넘는 성들이 있다. 이 성곽들의 축조 연대는 대략 13-14세기로 밝혀지고 있다. 이 시기는 삼별초가 제주에서 섬멸 된 이후다.

 

오키나와 성곽 주변에서 고려 기와들이 나타난다. 고려인들의 집단상륙이 예상된다. 성곽 축성은 고도의 토목기술을 가진 인력이 동원되지 않으면 성곽 축성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키나와 성들의 성격과 형태 그리고 구조들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 볼수 없다. 오로지 고구려와 고려의 성곽에서만 나타나는 공간 배치와 형식이다. 이러한 성곽 축성은 고도의 토목기술을 가진 세력들이 동원되지 않으면 이러한 성곽 축성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키나와 성곽의 축성 연대와 기술들은 이 시기에 한반도의 제주 또는 남부 도서 지방에서 퇴각한 삼별초 집단과 맞물리고 있다.

 

일본 오키나와현의 니키진성(今帰仁城). /김현민
일본 오키나와현의 니키진성(今帰仁城). /김현민

 

오키나와 뱃길

제주도에서 오키나와까지 거리는 900~1,000km 된다. 조선에서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에 표착했다가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기록들이 많다.

1770(영조 46) 1225일 제주항을 출항했다가 조난한 장한철(張漢喆) 일행은 3일 만인 28일에 오키나와의 호산도(虎山島)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1397(태조6)9명이 유구에 표착한 것을 시작으로 1546(명종1)까지 13건의 표류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1456(세조2) 나주 출신 양성(梁成) 1477(성종8) 제주 김비 1483(성종14)중국 양주 표류, 정의현감 이섬(李暹) 1542(중종37)박손(朴孫) 일행 유구풍토기」▲1687(숙종13)고상영(高商英) 안남국 표류 이듬해 12월 대정현 귀환표류견문」▲1770(영조46)애월 출신 장한철(張漢喆) 1893(고종30)1217일 양우종(梁佑宗·1863~1917) 조천포 출발 한양 가던 중 풍랑 만나 류쿠 열도 표류. ‘표해일기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오키나와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대부분 제주에서 전라도 남서 해안 도서로 가는 항해 중에 큰 풍랑을 만나서 표류한 사례들이다. 이런 표류기록들을 보면,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오키나와 사이에 문화와 풍습들이 적지 않게 교류되었음을 알수 있다.

고려 문인 이규보는 자신의 시에서 고려 배가 베트남 등은 물론이고 대식국(아라비아), 마팔국(인도), 섬라곡국(태국) 등지까지 오갔다고 했다.

 

삼별초 오키나와 이동 추정도 /김현민
삼별초 오키나와 이동 추정도 /김현민

 

오키나와에서 만난 제주의 어로 방법

채바다씨는 오키나와 구스크 성을 답사하던 중에 이곳 태생 고전승 高田勝씨를 만났다. 그는 선조들이 흑돼지를 잡아서 그 피를 이용하여 그물이며 주낙 낚시줄과 돛에 발라서 어로 활동을 하였다는 조상들의 풍습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전래 방법은 제주도 어로 모습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삼별초 세력이 오키나와에 도착해 현지 토착세력과 연대하며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해 나가는 한편 고려의 앞선 정치적, 문화적 경험과 제철, 선박 제조 기술 등을 전수해 준 게 아닐까. 그러면서 삼별초 후예들은 점차 현지에 동화되어 가면서 오늘에 이른 것으로 채바다씨는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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