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①…일본과 러시아의 영토 분쟁
사할린①…일본과 러시아의 영토 분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9.2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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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양국 경합…러일전쟁후 분할점령, 2차대전후 러시아령

 

사할린은 면적 72,492로 남한 면적의 70%를 웃돌고, 러시아에선 제일 큰 섬이다. 남북으로 948km나 길쭉하게 뻗어 있는데, 한반도 남북 거리 1,100km에 버금간다. 2019년 기준 인구는 49만명이며, 이중 러시아인이 83%로 가장 많고, 한국계 러시아인이 3만명 정도로 두 번째인 5.5%를 차지하고 있다. 한인은 러시아 이전에 살던 니브흐, 오로크, 아이누족 등 원주민보다 많다. 2차 대전 이전에 일본이 사할린을 절반 점령할 때 징용 갔던 조선인의 후손들이 사할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사할린은 원래 연해주와 붙어 있었다. 지구의 지각변동 과정에서 섬이 대륙과 갈라졌는데, 그 사이에 타타르해협이 있다. 가장 가까운 거리는 7km. 겨울에 해협은 얼어붙어 본토와 섬 사이에 썰매 이동이 가능하다.

 

사할린 섬에는 오랫동안 아시아 퉁그스 계통의 니브흐족(Nivkhs)과 오로크족(Oroks)이 살고 있었는데, 국가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11~12세기에 아이누족들이 사할린 남부로 밀려들었다. 아이누족은 일본 본섬(혼슈) 북쪽에 살고 있다가 일본 야마토(大和)족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홋카이도와 사할린으로 밀려난 것이다. 사할린에서 니브흐족과 아이누족 사이에 텃세 싸움이 벌어졌다. 니브흐족은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몽골에 지원을 요청했고, 몽골족의 ()은 사할린을 공격1308년 아이누의 항복을 받았다. 원나라 이후 니브흐족은 명·청에 조공을 바치고 복속했고, 사할린 남부엔 아이누족이 공존했다.

 

청말에 중원이 혼란스러워지며 사할린의 종주권이 모호해졌다.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 즉 무주물(無主物) 선점론이 판을 치던 제국주의 시대에 서양 열강은 물론 일본도 사할린을 들여다게 되었다.

일본은 혼슈 서북부의 마쓰마에(松前) 가문이 1835년 사할린에 탐사단을 보냈고, 탐사대는 지금의 포로나이스크에서 1636~37년 겨울을 숙영하고 돌아왔다. 1679년에 최초의 일본인이 사할린에 정착하게 되었다.

18세기가 되면서 유럽 열강이 사할린섬을 탐색했다. 1700년대말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태평양을 탐사한 후 영국은 태평양 구석구석을 뒤지며 지형을 탐색했다. 1797년 영국 해군의 윌리엄 브라우턴 선장이 사할린과 연해주 사이의 해협을 탐사하기도 했다.

 

미미야 린조가 그린 사할린 지도 /위키피디아
미미야 린조가 그린 사할린 지도 /위키피디아

 

영국은 사할린에 대해 지리적 탐사에 그쳤고, 러시아와 일본은 영토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일본의 북진정책이 교차한 곳이 사할린이었다.

일본인 마미야 린조(間宮林蔵)는 러시아인에 앞서 사할린과 아무르강을 탐험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의 명을 받고 1808년에는 북사할린 동해안을 탐험하고, 사할린이 대륙과 떨어져 있는 섬이라는 사실을 밝혀 내고 지도를 그렸다.

러시아가 사할린을 탐사한 것은 1849년으로, 일본보다 늦다. 시베리아 극동총독인 니콜라이 무라비요프가 게나디 네벨스코이를 원정대장에 임명하고, 아무르강과 태평양을 잇는 물길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네벨스코이는 아무르강 하구에서 깊은 수로를 찾아내고 이어 타타르 해협을 발견하고 사할린이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본인들은 타타르 해협을 미미야 해협이라 하고, 러시아인들은 네벨스코이 해협이라고 명명했다. 서로 자기들이 먼저 보았다고 하는데, 그곳이 해협이라는 사실은 원주민인 니브흐족이 알고 있었고, 원나라가 사할린을 원정할 때 이미 알려져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사할린이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했다. 사할린은 중국인들은 구예다오(庫頁島), 러시아인들은 사할린(Sakhalin), 일본인들은 가라후토(樺太)라고 부른다. 중국은 한때 종주권을 가졌으나 실효적 지배를 하지 못했고, 그 틈에 러시아와 일본이 사할린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사할린 분할(1905~1945) /위키피디아
일본과 러시아의 사할린 분할(1905~1945) /위키피디아

 

러시아와 일본이 최초로 사할린의 영유권을 놓고 벌인 회담이 1855년 시모다(下田) 조약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 페리 제독의 압박에 18543월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 오랜 기간의 쇄국정책을 폐기하고 개방한 연후에 서양 각국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때 러시아와 체결한 일·러 화친조약이 시모다조약이다. 이때 쿠릴열도는 우루프섬 북쪽에 대해 러시아 영토로 확정했지만 사할린섬은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공동 관할로 둔다고 합의했다.

러시아 극동총독 무라비요프는 사할린을 일본과 공유하는 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사할린에 유형지를 건설, 죄수들을 이주시키며 정착촌을 건설했다. 무라비요프는 일본측에 사할린이 러시아 영토라고 강하게 주장하며 협상을 다시 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측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일본명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에서 일본은 쿠릴열도를 얻는 대신에 사할린 전체를 러시아 영토로 내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러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다.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꺾자 상황이 달라졌다. 전후에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를 일본 땅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일본은 사할린 남부 영토에 가라후토청(樺太廳)을 두고,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40년간 지배했다.

이 관계도 2차 대전으로 역전되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소련은 남사할린에 병력을 파견, 점령해 버렸다. 동시에 쿠릴열도도 흡수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은 사할린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고, 러시아 영토로 굳어졌다. 일본은 쿠릴열도 남부 4개 도서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더는 사할린에 대한 주장을 하지 않고 있다.

 

사할린주 /위키피디아
사할린주 /위키피디아

 

러시아는 남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점령한 후 남사할린주(South Sakhalin Oblast)를 설치했다가 1957년에 사할린주(Sakhalin Oblast)와 합병하고, 하바로프스크 크라이로부터 독립시켜 독립주로 편성, 운용하고 있다.

 

사할린섬은 남북이 길쭉하기 때문에 기온차도 심하다. 1월 평균 최저기온은 남쪽 끝이 11.9 이고, 북쪽 끝은 -21.9 에 달한다. 습한 기후이며 여름에는 안개가 많이 낀다. 겨울에는 눈이 많고 잘 녹지 않는다. 산에는 5m씩 쌓이곤 한다. 여름엔 평균 최고 기온이 섭씨 21도까지 올라간다.

불곰, 순록, 사향노루, 스라소니, 여우, 수달, 담비, 다람쥐, 토끼, 딱따구리, 물개, 바다표범, 고래 등이 서식하고 가문비나무나 전나무, 자작나무, 눈향나무, 갯씀바귀, 마가목, 취나물 같은 여러 식물들도 자란다.

석유·석탄·천연가스·금속·수산물·임산물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극동총독 무라비예프가 사할린을 밀어붙인 이유는 석유매장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의 판단이 맞은 것이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것은 석탄 때문이었다. 일제가 탄광을 개발하기 위해 조선인을 끌고갔고, 소련이 사할린의 인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인의 귀국을 허용하면서도 한국인의 귀국을 금지시켰다.

 


<참고자료>

Wikipedia, Sakhalin

Wikipedia, Sakhalin Obl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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