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시 한가운데 휴식공간 제공한 선정릉
서울 도시 한가운데 휴식공간 제공한 선정릉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9.23 1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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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과 제2계비 정현왕후, 중종의 세 능침으로 구성…임진왜란 때 수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은 도시인들이 산책하기 좋은 코스다. 왕의 무덤들은 가뜩이나 녹지가 부족한 서울 강남에 녹지공간을 제공한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다. 이 곳이 서울에 편입된 후 강남이 개발되고 도심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되었다. 개발시대에도 선정릉의 숲은 자연림 상태로 울창하게 보존되었다. 덕분에 선정릉은 조선의 왕릉이자, 주민들과 직장인들에게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선정릉의 구조 /박차영
선정릉의 구조 /박차영

 

선정릉은 하나의 공원으로 되어 있지만, 두 임금을 모신 능묘다. 조선 제9대 성종과 제2계비인 정현왕후를 안장한 선릉(宣陵)과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에 난 제11대 중종의 무덤인 정릉(靖陵)이다. 합쳐서 선정릉(宣靖陵)이고, 세 능묘가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이라고도 한다.

이 곳에 능지가 들어선 것은 1495년 성종이 죽자 아들 연산군이 아버지의 무덤을 세우면서다. 연산군이 쫓겨나고 또다른 아들인 중종이 임금이 된 후 1530년에 생모 정현왕후가 죽자 어머니를 아버지 옆에 모셨다. 두 능묘가 같은 능역 안에 있으나, 언덕을 달리한다 하여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한다.

중종의 능은 원래 고양시 원당에 소재한 희릉(禧陵)과 언덕을 달리해(동원이강) 있었으나, 함께 있던 문정왕후 무덤이 장마 때면 물이 차오르는 형국이라고 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문정왕후 능도 함께 옮기려고 능을 조성해던 중에 지대가 낮아 홍수가 나면 능의 앞까지 물이 들어와 옮기지 못하고 태릉에 안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릉은 단릉으로 남게 되었다.

 

선릉 정자각 /박차영
선릉 정자각 /박차영

 

선정릉의 세 주인공, 즉 성종과 정현왕후, 중종은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성종은 1457년 의경세자(추존왕 덕종)와 소혜왕후 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채 두달이 되지 않아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었고, 세조 다음 왕위는 숙부인 예종에게 넘어갔다. 성종은 일찍이 할아버지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당대의 재상 한명회가 인물 됨됨이를 알아보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예종은 재위 14개월만에 죽었다. 성종은 왕위 계승권에서 뒤쳐져 있었다. 예종의 아들이 있었고, 형 월산대군도 버젓하게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예종의 아들은 세 살이었고, 월산대군은 문약한데다 병치레가 심했다. 결정적인 것은 당대의 세도가 한명회가 성종을 지지했고,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가 남편이 총애하던 성종을 낙점하는 바람에 성종이 뜻하지 않게 13살의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는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로 성종 5년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 성종이 맞은 왕비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였다. 윤씨는 연산군을 낳은 후 비상(독약)을 숨겨놓은 것이 발각되어 빈()으로 강등되었고, 성종 10(1479) 6월 서인으로 폐출되었다가 3년 뒤에 결국 사사되었다. 윤씨를 폐비시킨 후에 맞은 계비가 중종의 생모 정현왕후였다.

연산군은 즉위 직후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이 원한을 갚기 위해 사화를 일으켜 수십명의 사대부를 살해했다. 배다른 동생 중종과 어머니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폭정에 숨죽이고 살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바람에 권세를 얻게 되엇다.

 

선릉, 성종 능침 /문화재청
선릉, 성종 능침 /문화재청
선릉, 정현왕후 능침 /문화재청
선릉, 정현왕후 능침 /문화재청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수모를 당했다. 159313, 왜병들이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것이다. 선조는 대로했다. 왜란이 끝나고 조선은 일본에 국교 수립의 조건으로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압송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종과 막부를 조정하던 대마도주는 임기응변으로 2명의 도굴범을 잡았다며 조선으로 보냈지만 모두 가짜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외교적 파장을 생각해 이 쯤에서 덮어두기로 하면서 유야무야 되었다. 결국 압송된 대마도민 2명은 참수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전란으로 재궁이 전부 불타 버렸고, 세 능묘 안에는 시신이 없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침에서는 시신이 사라지고 잿더미들만 나왔고, 중종의 능침에서는 시신이 나왔으나 그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가려내질 못했다. 전쟁은 산 사람에게만 피해를 준 게 아니라, 죽은 자에게도 수모를 준 것이다.

 

정릉과 정자각 /박차영
정릉과 정자각 /박차영

 

능침사찰은 1.5km 거리에 있는 봉은사(奉恩寺). 선정릉은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공인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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