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에 남아 있는 추사의 마지막 흔적
봉은사에 남아 있는 추사의 마지막 흔적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9.2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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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 원찰로 지정, 보우의 거점…추사와 초의선사가 교유하던 곳

 

봉은사는 항상 북적거린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종로구에 있는 조계사는 주변에 빌딩들이 차 있어 답답하고 확장에 한계가 있지만 봉은사는 뒤에 야트마한 수도산이 있어 여기저기 숨 쉴 공간들이 있다. 신도보다는 지나가는 과객이 많은 것 같다. 한국 문화를 알고 싶어하는 외국인, 빌딩 숲에서 잠시 벗어나고픈 도시인들이 잠시 산책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봉은사 입구 /사진=박차영
봉은사 입구 /사진=박차영

 

신라 원성왕 10(794)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한 견성사(見性寺)가 그 전신이라 전해진다. 신라시대에 한주(漢州)는 변두리였기에 절의 규모가 초라했을 것이다.

봉은사가 커진 것은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가 선릉에 성종을 안장하고 가까이 있던 견성사를 원찰로 삼고 이름도 봉은사로 고치면서부터다. 연산군 41498년의 일이다. 원찰(願刹)은 창건자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을 말한다. 성리학이 판을 치던 조선시대에 왕릉 가까이에 원찰을 두었는데, 사찰을 앞세워 망자를 좋은 곳에 보내가 산자들이 복을 반고 싶었던 게다. 정현왕후도 죽어 지아비 옆에 묻히고 그의 아들 중종도 선릉에 안장된다. 봉은사는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는 큰 사찰로 부상하게 된다.

명종(재위 15451567) 때엔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불교신도로, 고승 보우(普雨)를 등용하게 된다. 보우는 봉은사 주지로서 교종을 부활하고 승과(僧科) 실시를 건의해 명종 7년ㅇ[ 봉은사 앞 벌판에서 승과 시험이 치러졌다.

 

대웅전 /사진=박차영
대웅전 /사진=박차영

 

문정왕후 사망 후 보우가 몰락하고 봉은사는 기울게 되었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절은 전소한다. 병자호란 후 숙종 18년에 중창되었으나, 1939년 화제로 판전(板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는 바람에 모두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지금의 봉은사는 그 이후 하나씩 중창된 것이다.

절을 둘러보면 건물들이 고풍스럽다는 느낌이 별로 나지 않는다. 오히려 강남의 돈 냄새가 물씬 풍긴다. 조선시대엔 왕실의 보호를 받고, 현대에는 자본가의 후원을 받아 부유한 절이란 느낌이 강하다. 조계종 절 가운데 가장 시줏돈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란 얘기도 있다.

 

판전 /문화재청
판전 /문화재청

 

봉은사의 백미는 판전이다. 봉은사 판전(奉恩寺 板殿)1856년에 창건되고 1878년 중수된 단층 맞배집 목조 건축물로, 봉은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1939년 화마도 빗겨갔다.

판전은 화엄경(華嚴經) 판각(板刻)을 보관하던 곳이다. 판각은 평평한 나무 널쪽에 글씨를 새긴 것을 말한다. 화엄경은 대승경전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서적인데, 화엄경 80권의 내용이 나무판에 꼼꼼히 새겨 놓았다. 판전을 판각한 분은 남호 영기(南湖永奇, 1820~1872) 스님인데, 일주문에 들어서면 야트마한 언덕 자락에 그의 비석이 있다. 판전 내 경판을 보호하기 위해 실내 벽 가장자리에 받침대를 만들고, 경판에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 하려고 바닥에 온돌을 깔았다.

 

​추사 김정희 길씨가 적힌 판전 편액 /사진=박차영​
​추사 김정희 길씨가 적힌 판전 편액 /사진=박차영​

 

판전의 현판은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가 썼다.

편액에는 板殿이란 큰 글자 옆에 세로로 七十一果病中作’(칠십일과병중작)이라는 잔글씨가 있다. 추사 71세 되던 1856, 병을 앓는 중에 과천 집에서 썼다는 얘기다. 일설에 추사가 사망하기 3일 또는 4일 전에 썼다고 한다. 김정희 최후의 작품인 셈이다.

김정희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1852년 풀려난 그는 과천에서 살며 봉은사를 오가다가 죽음을 맞았다. 봉은사에는 그의 벗이자 인생 스승인 초의(草衣)스님이 있었다. 이 편액은 불교와 유학의 만남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영산전 /사진=박차영
영산전 /사진=박차영

 

대웅전 뒤편에 예서체로 편액을 쓴 영산전(靈山殿)이 있다. 편액을 쓴 이는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이자 20세기 초에 문인화가인 백련 지운영(白蓮 池雲英, 1852~1935)이라고 한다.

 

야외 불상 /사진=박차영
미륵대불 /사진=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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