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운 뒤 고구려와 여러차례 각축전을 벌였다.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전사하며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백제 동성왕은 신라 이찬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고구려에 대항하는 백제-신라(羅濟) 동맹이 맺어진다. 이른바 나제(羅濟)동맹이다. 이 동맹은 그 이후에도 이어져, 성왕이 독산성 전투(548년)에서 신라군을 끌어들여 승리함으로써 한강유역을 다시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나제동맹은 여기서 끝났다. 혹자는 나제동맹을 깬 나라는 신라이고, 그 주인공이 병부령에 올라 군권을 장악한 이사부 장군이라고 말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성왕은 신라의 금관국 합병 이후 대가야와 잔여 소국을 사비성을 불러모아 가야 재건을 외치며 신라와의 대항을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산라의 팽창에 백제가 두려움을 갖게 되면서 나제동맹이 금이 가기 시작했고, 도살성·금현성 전투에 이어 관산성 전투를 거치면서 나제동맹은 깨지게 된다.
적과의 동침은 깨져가고, 나제동맹에 균열이 생겼다. 독산성 전투 2년후(550년)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혼전을 펼치며 두 나라의 군사들의 기력이 쇠해있는 틈을 타서 신라 이사부 장군이 두 성을 빼앗았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백제본기」, 「고구려본기」, 「열전」 등 4곳에서 나온다.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의 균형이 깨지는 중요한 대목이 도살성, 금현성 전투이고, 이 전투의 승자는 이사부 장군이었다.
① 진흥왕 11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해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명을 두어 지키게 했다. (신라본기)
② 양원왕 6년 정월, 백제가 침입해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했다. 신라가 이 기회를 틈타 두 성을 빼앗았다. (고구려 본기)
③ 성왕 28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해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했다. (백제본기)
④ 진흥왕 재위 11년인 태보(太寶) 원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명했다. 이사부는 그들을 쳐서 두 성을 빼앗고는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수비하게 했다. 이때 고구려가 병력을 보내 금현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해 크게 승리했다. (열전 이사부조)
사료를 해석하면 백제가 충청북도 한강 중류를 장악하기 위해 우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 사비성과 도살성 중간에 있는 금현성을 공격해 도살성을 고립시키고, 한강 중류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혈투가 벌어진다. 이사부는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전법을 썼다. 두 나라가 한치의 양보없이 싸우다 지칠 무렵 군대를 동원해 두 성을 차지하고, 한강 중류를 차지했다. 신라가 드디어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에 발을 걸쳐 놓은 것이다.
도살성과 금현성이 어디인지에 대해,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학계에서는 도살성의 위치에 대해서 ① 충북 음성의 백마령 ② 충남 천안설 ③ 충북 증평 이성산성과 진천 두타산성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로 나눠져 있다. 후대 선덕여왕때 김유신이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물리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금현성은 ① 충북 진천군 서쪽이라는 설 ② 충남 연기군 진동면과 전의면 경계라는 설 등이 있다.
도살성과 금현성의 위치에 대해 <삼국사기>가 저설된 고려 중엽에도 정확하게 비정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신라의 입장에서는 두 성이 모두 소백산 너머에 있고, 도살성이 금현성보다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남한강 수운을 지키는 길목이라는 사실이다.
이사부가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북도의 남한강 중류를 장악하게 됐다. 남한강 수운은 육로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대량의 물자를 수송하는 교통로 역할을 했다. 태백산맥 서쪽과 소백산맥 북쪽에서 생산된 농산물, 목재등 임산물이 물길을 따라 이동했고, 이 강을 끼고 있는 평창, 단양, 충주, 여주, 양평등지엔 오래전부터 대규모 장이 열렸다. 신라로선 한강유역을 공략할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충청도의 표가 어디로 가는지에 권력의 향방을 가늠한다. 대선 때만 되면 충청도 표를 의식한 발언이 쏟아진다. 삼국시대에도 충청도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치열했다. 이사부가 도살-금현성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경상북도 동쪽에 치우쳐 있는 작은 왕국은 한반도 주역으로 떠올랐다.
이제 신라는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의 표적이 됐다. 한강 지배를 위한 본격적인 혈투가 시작된다.
소백산 고개를 넘어 남한강 중상류를 장악한 이후 신라는 한강 하류와 경기도 일대에 대한 공세에 나선다. 이사부에 이어 진골출신의 거칠부, 금관국 왕족 출신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이 전면에 등장하고, 진흥왕은 점령지를 방문(巡狩)하면서 점령지 백성을 진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