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최초 흑인 재무장관, 시장신뢰 못얻었다
영국최초 흑인 재무장관, 시장신뢰 못얻었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9.2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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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식 공급경제정책에 발작한 시장…IMF 포함. 전문가들 일제 비판

 

공급중시 경제학 또는 공급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은 세금을 낮춰 근로의욕을 높이고 기업투자를 높여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경제이론이다. 이 경제정책은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채택해 침체의 늪에 빠진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0년후 영국의 재무장관 쿼지 콰텡(Kwasi Kwarteng)이 이 정책을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콰텡 장관은 지난주 금요일인 23일 소득세와 주택 구매 때 내는 인지세를 내리고 법인세 인상 계획을 철회하는 등의 방침을 밝혔다. 그가 제시한 감세규모는 450억 파운드(480억 달러 상당), 영국 GDP1.5%에 해당한다. 부족한 세수는 채권발행으로 메운다는 것이다. 콰텡은 영국의 GDP대비 경상적자의 비율이 8%G7 국가중에서 두 번째로 낮기 때문에 감세조치로 인한 충격이 약하고 경제에 활력을 줄 것이라고 했다. 콰텡은 시장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월요일이 돌아오자 시장은 콰텡 장관의 조치를 차갑게 받아들였다. 영국 파운드화가 5% 폭락하고 장기국채 금리가 1%P 상승해 5%대로 치솟았다. 금융시장의 반응은 물가가 10%대로 치솟은 상태에서 세수를 줄이고 국채발행을 늘리면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시장 금리가 오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급중시 정책은 1980년대 중반에 미국 레이건 대통령 때에도 같은 상황이었는데 성공했다. 오일쇼크로 미국의 물가는 치솟았고, 재정적자는 누적된 상태에서 레이건은 감세정책을 단행해 미국 경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세계 외환보유액 중 통화구성 추이 /위키피디아
세계 외환보유액 중 통화구성 추이 /위키피디아

 

그러면 40년전 미국의 공급중시 경제정책은 성공하고 지금 영국의 같은 정책은 시장의 불신을 사는 것일까.

첫째 이유는 영국의 시장 주도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1979~1981년 사이 미국 연준의장 폴 볼커는 가파르게 금리를 올려 1980년대 초반에 인플레이션을 일단 잡았다. 하지만 고금리는 달러 강세를 유발시켜 미국 무역적자를 악화시켰다. 그 상황에서 레이건은 감세정책을 추진했다. 다른 한편 미국은 1985년에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 냈다. 미국 재무장관은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등 주요 4개국 재무장관을 불러 인위적으로 달러 절하를 강요해 합의를 유도한 것이다. 미국은 달러 절하라는 강제수단을 동원할수 있었기 때문에 기업의 상품경쟁력을 높이고 감세 효과를 증폭시킬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영국 파운드의 시장 주도력은 제한적이다. 세계외환보유액 총액에서 달러 비중이 60%인데 비해 파운드의 비중은 5%대 이하로 일본 엔화보다 낮다. 영국의 외환보유액은 2,000억 달러를 약간 웃도는데 이는 우리나라 보유액의 절반 수준이다. 세계 5위 경제력 보유국의 보유외환이 18위를 기록한 것은 파운드의 기축통화 능력을 과신한 게 아닐까. 어쨌든 영국의 외환보유액은 이번에 파운드 방어에 효과를 보지 못했다.

2차 대전 이전에 세계 최고의 위력을 자랑하던 파운드는 한 세기를 넘기며 2류로 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파운드가 신흥국 통화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쿼시 콰텡(2012년) /위키피디아
쿼시 콰텡(2012년) /위키피디아

 

둘째는 신임 재무장관 쿼지 콰텡에 대한 시장 불신이다. 콰텡은 영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재무장관이다. 콰텡은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는 모두 아프리카 가나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유학온 이민자 출신이다. 47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영국 각료서열 2위에 오른 그는 이튼 스쿨, 케임브리지대를 거쳐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그의 전공은 경제사였으며, 데일리 텔레그라프 칼럼니스트, JP 모건체이스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2010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열열한 브렉시트 지지자로서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신임을 얻어 2021년 보수당 내각에서 첫 흑인장관으로 경제산업부 장관에 올랐고, 이번에 리즈 트러스 내각에서 2인자이자 재무장관에 오른 것이다.

 

이달초 재무장관이 된 콰탱의 첫 야심작이 감세정책이었다. 그의 정책은 지나치게 원론적이고 현실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국 재무장관과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래리 서머스 교수는 콰탱의 정책이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며 "장기채 금리 상승 기조 강화와 통화 약세는 신뢰도 상실 상황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말했다. 서머스는 "영국의 금융위기는 전 세계 금융중심지로서 런던의 생존능력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면서 "변동성이 펀더멘털을 훼손하고, 이게 다시 변동성을 키우는 악순환의 위험이 있다"고 했다.

남의 나라 경제정책에 언급을 자제하는 미국 연준 간부들도 입을 열었다. 래피얼 보스틱 미 애틀랜타 연준 총재는 워싱턴포스트에 영국의 감세 정책으로 세계 경기후퇴 가능성이 커졌다고 했고, 찰스 에번스 시카고 총재도 CNBC 방송에서 영국의 상황에 대해 "매우 도전적"이라고 말했다.

결정적 간섭은 국제통화기금(IMF)이다. IMF는 주요주주이기도 한 영국에 대해 이례적으로 왈가왈부했다. IMF"인플레이션 압력 상승을 고려하면 우리는 이 시점에 표적이 막연한 대규모 재정지출을 권하지 않는다"며 트러스 정부의 대규모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 계획의 철회를 촉구했다. IMF는 재정정책이 통화정책과 목적이 어긋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케니스 로고프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다음 총선에서 노동당 승리가 유력한 상황에서 보수당의 미숙한 정부가 홈런 치려고 풀스윙하는 형국"이라고 말했고,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레이건을 흉내내는 트러스의 시도는 실패할 운명"이라고 했다.

 

신사의 나라를 자처하는 영국에서 장관의 피부색깔을 논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그의 출신을 거론한 발언이 나왔다.

부모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출신인 루파 허크(Rupa Huq) 하원의원은 노동당 전당대회 부대행사에서 "콰텡 장관은 겉으로는(superficially) 흑인이지만, 방송에서 말하는 걸 들으면 흑인인지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집권 보수당은 물론 노동당에서도 허크 의원의 발언에 대해 벌떼처럼 일어났다.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대표는 허크 의원의 발언을 인종차별적이라고 비난했고, 노동당은 이 여성 의원에게 당원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다.

 

트러스 내각은 발빠르게 중앙은행에 지원을 요구했다. 잉글랜드 은행(BoE)은 현지시간 28일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긴급 대규모 국채 매입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BoE1014일까지 장기 국채를 사들이겠다고 밝히면서도 매입규모를 제시하지 않았다. 무제한 사들이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중앙은행의 개입 이후 시장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30년만기 국체금리는 1%P 떨어졌고, 환율도 1.6% 가라앉았다.

1야당인 노동당은 트러스 내각의 감세정책 철회를 요구했다. 시장이 동요하면서 보수당 내부에서도 콰텡 장관 사임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트러스 정부는 감세정책을 포기하거나 콰텡 장관을 사임시키겠다는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일시적인 시장 동요로 정책기조를 변경하거나 내각을 흔들지 않겠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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