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뱃길④…제주-진도 탐험항해
삼별초 뱃길④…제주-진도 탐험항해
  • 아틀라스
  • 승인 2019.06.2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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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삼별초 뱃길을 항해하다

 

고대해양탐섬연구소장이자 시인인 채바다씨가 201110월 제주~진도 탐험한 항해기를 요약, 정리한다.

 

삼별초 탐험항해를 위해 50-60년 전 돛배(일명; 風船, 帆船)을 어렵게 마련해 제주와 진도를 왕복했다. 선박은 전장 5m,2m. 1(돛 길이;3m. 돛 폭:2m 천으로 제작한 아주 열악한 소형 풍선이다. 이런 작은 규모의 풍선을 타고 700년 전 항해를 재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배의 안전과 어장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선외기(15마력)을 보조로 장착했다.

이 돛배는 제주와 한반도 남서동해안 도서에서 오래전부터 해녀와 어부들이 주로 연안에서 물질과 고기잡이로 이용하던 아주 작은 배다. 큰 바다로 떠가면 크든 작든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불과 하다

탐라-진도 탐험항해 목적은 13세기 원나라 복속에 반대하여 고려를 바로 일으켜 세우려는 삼별초의 구국정신들을 뒤돌아보고 이들의 불굴의 정신을 조명함으로써 삼별초의 정체성과 위상을 조명하기 위해서였다.

 

<20111023>

이번 탐험항해 나서는 배 이름을 삼별초호로 명명하였다.

이른 아침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포구에서 제주시 화북항으로 이동하였다. 날씨는 항해에 큰 어려움이 없는 0.5m 파도이다 바람은 거의 불지 않고 있다.

채바다(68), 대원 이종호박사(64), 고태홍(69), 경인방송 카메라 촬영 PD 등 모두 4명이 승선하니, 배가 너무 작았다. 연안을 따라 화북포구까지 7시간은 족히 걸려야 한다.

포구를 밀물(들물)에 빠져 나가야 한다. 썰물을 만나면 그만큼 저항을 받는다. 2-3노트 속력을 이용하여 우도를 오른쪽으로 보면서 하도 등대를 지났다. 해녀 몇 사람이 아침 일찍 부터 물질하는 모습이 보인다. 해녀는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곳 해안선은 문주란 자생지로 일명 토끼섬이라고 한다. 혹시나 가다랭이라도 잡힐가 하여 준비한 낚시 줄을 풀었다.

낚시줄을 10m 정도 흘리는 트로링 낚시법이다. 한 마리 걸리기를 기대한다. 다랑어는 바람이 조금 일고 파도가 뱃전에 찰랑찰랑 해야 입질을 한다. 이런 잔잔한 바다 사정에서 입질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10:30 제주항에서 출발했다는 해양 경비정이 화북 포구까지 안전항해를 위해 출동하였다. 김녕 해수욕장 앞바다에서 풍향이 바뀌어 다시 돛을 올렸다. 북쪽으로 여서도와 완도가 멀리 보인다.

13:20 김녕항에 들려서 잠시 휴식과 라면으로 허기를 달랬다.

15:05 제주시 북촌 다려도를 통과했다.

16:45 화북항에 도착 하였다. 내일 행사 준비와 숙소를 점검 하였다.

 

삼별초 뱃길 탐험대 /채바다씨 제공
삼별초 뱃길 탐험대 /채바다씨 제공

 

< 20111024>

08시 일찍 숙소에서 나와서 하북 포구로 나가서 행사장 준비를 점검했다. 이른 아침부터 화북 포구는 바람 한 점 없었다. 포구에 위치한 해신사에서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海神祭를 올렸다. 이 해신사는 조선시대부터 항해자들의 안전을 위해 세워졌다.

10:00시 출항제및 출항식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 주었다. 해신사에서 안전과 성공적인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제를 먼저 올렸다

부만근 전제주대학교 총장, 김영훈 전 제주시장, 제주도의원 신영근(화북동), 박규헌(애월읍) 애월읍장, 이용화 애월읍 고성리장등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와 주었다. 긴 대나무에 삼별초의 혼, 성공 항해 기원을 적힌 깃발(만장)들고 나와서 응원해 주었다. 화북동에서는 어머니 민속 풍물패가 항해의 안전에 힘을 실어 주었다. 제주오름무용단의 궁중무용 화관무, 유지우양의 탐라의 향기 춤으로 이어 졌다. 북악 포럼에서 함께 하는 권무일(소설가)도 자리를 함께해 주었다.

10:45분 출발

PD(obs 경인방송)가 전 항해일정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동승하기로 하였다. 제주 주재 여러 방송국과 신문기자들이 나왔다. 기자들의 촬영 편의를 위해서 어선 1척과 제주시 어업지도선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바람 한 점 없던 바다는 다시 2시간 넘짓 항해 끝에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하더니 풍랑주의보 발령이 내렸다. 첫 시련을 안겨 주는 기상통보이다. 오늘 항해의 목적지는 추자도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상에서 추자도까지 항해는 어렵다는 판단을 하였다. 필자 혼자라면 몰라도 대원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 해야만 했다.

12.15분 회항 결정을 내렸다. 가장 가까운 제주 공항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다끄네 포구로 뱃머리를 돌렸다.

13.30분 다끄네 포구 인근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였다. (다끄내는 옛날에 물동산이라 불렀다. 돌새미라는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중심으로 다끄내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은 확장공사로 옛 모습이 아니다.)

 

< 20111025>

주의보가 해제 되려면 하루를 더 이 포구에 배를 정박시켜 놓을 수밖에 없다. 일행은 항몽 유적지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화북으로 동제원 터와 송담천을 찾았다. 제주시 원 도심에서 동쪽에 위치한곳으로 삼별초의 발자취가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화북동 동제원(東濟院) 터와 송담천(松淡川) 싸움

동제원은 제주성-조천진성 사이 현 화북에 위치한 곳이다. 제주목과 정의현을 잇는 중간지점에 동원을, 제주목-대정현 중간지점에 서원, 대정현-서귀진 사이에는 중문원(中文院)에 여러 원을 두었다동제원은 고려 원종 11(1270) 11월 영암부사(靈岩副使) 김수(金須)와 장군 고여림(高汝霖)이 거느린 관군과 삼별초의 이문경(李文京)이 거느린 군사가 접전할 때 고려관군이 진을 쳤다는 곳이다.

이곳 전투에서 삼별초군이 승리함으로써 삼별초가 제주를 2년간 점거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이곳은 육지와 왕래를 위해서 관원의 출장, 부임으로 제주의 관문 역할을 위해 세워졌으며 제주 말들을 강진과 해남등지로 공급하는 주요 포구로 이용되어 왔다.

 

< 20111026>

새벽 05시 숙소에서 일찍 빠져나와서 용두암과 다끄네 포구로 향했다

06:00 바람과 파도가 어제와 달리 조금 숨을 고르는 듯하여 출항을 서둘렀다. 파도의 높이는 2-3m 예상 보다 다소 높았지만 해양경찰에 출항신고를 하였다.

06.50 도편에 해가 솟기 시작하고 선실에는 물이 차 있었다. 고태홍 대원이 물을 퍼냈다. 포구를 빠져 나갔다

09시 저 멀리 관탈섬 보이지만 아직까지 시계는 좋지 않았다. 파도는 사정없이 뱃길을 막아서고 있다.

15시 추자도 앞 해상 사자도 인근에 도착 하였다. 조류는 예상 보다 세다. 1m 전진하기가 예사롭지 않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겨우 물때가 바뀔 무렵 센 물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16.00 신양항(여객선 운항)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해두어 추자 면장 맞아주었다. 마침 제주-완도 여객선 한일호가 입항 경적을 울린다. 우리팀도 상륙 준비와 해경에 신고를 마쳤다. 이종호박사 자동차편으로 대서리항으로 미리 이동하였다. 기상 악화로 예정 보다 늦은 일정 때문에 신양항에서 대서리항까지는 선외기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17시 대서리항으로 이동

18시 대서리항 도착하여 숙소인 등대민박에 여장을 풀고 인근 중앙식당에서 저녁 식사와 함께 추자도산 삼치회와 막걸리로 항해 피로를 풀었다. 내일 항해를 위해서 식당에 부탁하여 김밥을 미리 주문했다.

 

< 20111027>

06:27분 대서리항을 출발했다.(썰물 때를 맞추기 위해서 일찍 서둘렀다). 범선항해는 일정한 포구를 벗어나려면 썰물 때를 이용해야 한다. 노를 젖는 노동력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보길도를 1시 방향에서 희미하게 나타났다. 視界가 안 좋은 편이다. 또한 섬과 섬들이 총총히 자리 잡고 있어서 물살 거세었다.

07:40 : 횡간도를 겨우 빠져 나왔다. 준비한 김밥으로 아침 먹었다.

08:25 제주경비정과 목포해경(Korea coast Guard : 278)1마일 정도 떨어져서 삼별초호의 항해를 지켜보고 있다. 검은 물빛이 푸른 물빛으로 바뀌었다. 이런 바다 사정을 보고 완도 해상을 가리켜서 장보고는 청해라 하지 않았던가. 멀리 모래채취선과 멸치잡이배가 선상에서 잡은 멸치를 가공하는 모습이 들어 왔다. 열탕에서 뿜는 수증기가 얕게 시야에 들어온다. 파도는 거의 없다. 기장감이 다소 풀린다.

10:20분 해양 경찰 경비정이 임무 교대를 하고 멀리 사라진다.

11:40분 썰물로 바뀌어 한결 항해 속도가 빨라진다.

12시 라면으로 점심을 하다.

13시 예정보다 빨리 금갑항 연안에 도착 김과 굴 양식어장 규모가 대단하여 끝 안보일 정도로 수평선과 마주볼 정도로 넓다. 금갑항으로 들어서는 해안을 찾지 못하여 한 창 어려움을 겪었다. 어장에 깔려 있는 부표들이 거의 7-8km 펼쳐 있다.

목포해경 소속 경비정이 안내를 해준다. 어장을 통과하려면 선외기를 이용하였다. 금갑포구 인근 2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도 부군수 임정환, 관광과장, 진도군 학예연구사 김명현등 마중 나와 있었다. 진도군에서 환영시간에 대비하여 1시간가량 바다 한가운데서 대기하기로 하였다.

15:00 금갑항에 도착했다. 진도군에서 부군수,문화관광 박수길 과장, 학예연구사, 김명현 군의원 박영상, 장재호 전 군의원 마중 나와서 환영해 주었다. 진도 북춤놀이단(보유자 박강열)까지 나와서 크게 환영해주어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16: 숙소 태평 호텔로 이동하여 진도군에서 탐험대를 위해서 저녁 식사까지 함께 해 주었다.

 

< 20111028>

09.00분 진도군 김명현 학예사의 안내를 받고서 금갑항으로 갔다. 삼별초호 이상 유무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읍내서 금갑포구까지 15km 위치에 있다.(진도군 의신면 금갑포구) 우선 장재호 전 군의원(문화해설사)는 김약행 유배가옥을 답사하는데 앞장서 주었다.

이어서 삼별초의 발자취를 찾아서 발길을 옮겼다. 활곡리, 원두리 사마고개 (해발 50-60m)는 사마골로 알려지고 있는곳으로 삼별초 김통전 장군이 연합군에 밀리면서 말이 대량으로 죽었다는 고개이다.

거룡리 부녀동는 일명 부녀굴로 불린다. 여몽 연합군의 전쟁통에 희생된 이곳 마을 남자들이 죽자 홀로된 여자들의 집성촌으로 알려진 곳이다.

만길리 앞 송장동, 장군바위가 위치한 곳으로 과거에는 바다였으나 현재는 농경지로 바뀌었다.

궁녀둠벙으로 이곳 진도 주민들이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들이 시체가 쌓였던 들판이다. 당시는 목화밭으로 전해 오고 있었다. 일명, 떼무덤, 돈지벌이라 했다. 돈지리 주민 박영희(65)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밤이 되면 궁녀둠벙에서 많은 여인들의 우는 소리가 이웃 마을까지 들릴 정도로 당시 여인들의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참상들을 떠올리게 되는 이야기들이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어서 가슴이 아팠다. 이곳 인근 용등방(개천)의 물소리는 폭포처럼 들려서 마치 사람이 우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

논수정(論壽亭)은 일명 논숙골, 논수정(論壽亭)으로 전래되는 곳으로 홍다구가 온왕의 거취와 사후 죽음에 대한 문제들로 회의를 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까운 곳에 온왕 무덤의 무덤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가묘로 그 때의 현장을 그대로 지켜 볼 수 있었다. 탐험대는 숙연한 마음으로 업드려 예를 올렸다.

바로 용장산성( 257만평 규모)과 왕궁터를 답사하고 잔디밭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었다. 진도신문 편집인 허선무와 울금 막걸리를 놓고 진도 가락에 대한 내역들을 들려 주었다.

술아 술아 울금 술아/ 목구멍에 넘어가지 말고/ 입에서 놀다가 삼켜 부려/ 난리통에 억울하게 죽은 아녀자들 분통하여라/ 울금 술 한 잔에 이 슬픔 삭혀 질련가?/ 울금 술 마셔서 씻어 내릴 수 있을란가?”

망바위, 석치정에 올랐다. 이곳은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의 상륙을 감시하기 위해 망을 보던 전망대라고 했다. 망바위에서 벽파진과 울돌목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서남쪽으로 용장산성 싸움터가 내려다보인다. 이 바위에 올라가는 중간에 말무덤이 있다. 많은 말이 퇴각을 하면서 고갯마루를 채 넘지 못하고 죽어서 뭍힌 곳이라 했다.

저녁에 진도신문 박남인 편집국장이 홍주를 가지고 부인과 함께 숙소로 찾아 주었다.

이후 진도는 1350년 공도정책으로 주민들이 철수하여 섬은 텅텅 비어 있었다.

1431년 조선왕조 때 만호진이 설치하여 금갑진성을 축조 하였다. 1437년 진도에 다시 사람들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금갑진성은 많이 훼손 되어 현재 북벽 173미터, 서벽 163미터 성벽의 흔적을 찾게 된다. 주민들은 인공양식장이 들어서면서 이곳 성벽 돌멩이들을 바다에 투석하여 굴양식에 이용하여 그 아쉬움들이 크다고 했다 .

 

< 20111029>

05시 기상 금갑항으로

06.00 금갑항에 도착, 북서풍으로 순조로운 항해가 예상 된다. 다시 추자도를 거쳐 제주 애월항으로 돌아가는 항해 코스를 잡았다. 썰물 많이 빠져나가서 삼별초호는 뻘밭 해안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곳 나루터식당 조향휘가 일찍 나와서 탐험대에 도움을 주었다.

0730분 밀물이 서서히 들어오면서 삼별초호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새벽부터 어장으로 나가는 주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재호(문화해설사)씨는 음료 과일 가지고 나와 금갑포구를 떠나는 대원들과 아쉬운 석별 인사를 나누웠다

북서풍이 북동풍으로 몸을 틀고 다시 북서풍(파고 0.5미터)에 돛을 올렸다.

07:50 : 목포해경소속 경비정(P-87)는 벌써부터 양식장과 10킬로미터 밖에 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김밥으로 아침을 때웠다.

08;20 : 양식장을 빠져 나왔다.북서풍, 3-4m 불었다. 안개가 짙게 깔렸다.

09:20 : 잠시 빗방울이 떨어진다.

09:35 : 해경 P-278호로 임무 교대를 한다. 가거군도 오른쪽을 비켜 가는데 비가 그치고 바람과 파도가 높다. 바다는 변덕스러움이 있어서일까.

11:00 : 경비정 P-279호로 다시 임무 교대 모습을 목격했다. 視界는 약 5m 이다

12:00 : 파고 23미터, 라면으로 배를 채웠다.

13:40 : 안개로 시계 불안정 횡간도 5마일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똥파리 3마리 반갑게 나타났다. 섬이 가깝다는 신호이다. 대서리항 까지 동행, 갈매기도 없는데 반갑다 똥파리야.

14:50 : 멀리 추자군도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15:15 : 경비정 또 다시 임무교대(4번째)

15:30 : 횡간도 통과하여 추자도 전면에서 대기 하고 있다. 진도 홍주로 해신에게 지금까지 안전하게 항해를 도와주어 고시래 술잔을 채워 해신께 고했다.

16:00 : 등대 입구에서 돛을 내렸다. 성공적인 항해와 입항을 해경에 신고 했다.

이곳 어부들의 말을 빌리면 1960년대까지 작은 풍선(돛배)들을 이용하여 진도 어부들은 추자도까지 고기잡이를 하였다고 친절하게 전해준다. 고태홍 대원은 안도라도 한듯 그동안 몇 고비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지옥에 갔다 왔다고 실토를 한다. 이곳까지 배에 바닷물이 들어서 45번 배에 퍼냈다.

 

<20111030>

06:15 : 일찍이 다시 해경에 출항 보고를 하여 추자도 대서리항을 출발 했다.

06:25 : 하추자-상추자를 연결 하는 추자대교를 통과 했다. 마침 북서풍이 알맞게 불어 주었다. 순풍이 아닐 수 없다. 옛 부터 추자도는 제주를 오가는 범선(풍선)들의 후풍처가 되 주었다. 이를 두고 항해자들 사의에는 후풍도라 부르기도 했다.

06:30 : 돛 올리다

06:40 : 제주해경 상황실과 통화 하였다. P 303호 경비정이 지원한다고 한다.

외곽도, 절명도, 관탈도를 보면서 항해를 하였다. 파고는 34미터로 높아졌다. 08:00까지 썰물과 북서풍으로 삼별초호는 신의 바람을 업고 3-4노트 속력을 낸다. 일기예보에 파도 높이는 0.51미터 예보 했지만 바다 한가운데는 관측과 다르게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갈린다. 파도는 벌써 45미터로 높아졌다. 경비정에서 안전에 주의해 달라는 전통이 날아 왔다,

08.40 : 화도가 보인다. 오랜만에 고깃배가 보인다. 아직까지 항해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09:15 : 화도에 몰아치는 역 파도의 영향이 만만치가 않다. 전진 거의 우측으로 화도를 통과 했다.

10:00 : 소관탈, 대관탈섬 보인다. 멀리 떨어진 해상에서 해저 통신 시성 선으로 보인 선박이 목격 되었다.

11:35 : 파도는 더 높아(4-5미터) 졌다. 앞을 보는 시계가 불안정 하다. 한라산 이 나타날 시점인데 좀 체로 보이지 않는다. 짙은 해운 때문이다.

12:00 : 인근에서 조업하던 어선 한 척이 침몰했다는 통보받은 경비정은 그곳 사고현장으로 이동 한다.고 긴급 통보 해 왔다. 파도가 점점 거세다.

12:15 : 기세를 부리던 높은 파도는 23미터로 낮아 졌다.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늘에 해의 방향을 겨우 가늠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는 옛 사람들의 지혜를 빌려 천문항해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12:30 : 전면에 한라산 형체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 했다. 안심을 못 했던지 급파된 경비정(303) 삼별초호 찾아 나섰다는 통신 연락이 왔다.

12:55 : 삼별초호가 무사함을 알려 주었다.

13:30분 드디어 제주 애월항에 무사히 도착 하였다. 예정 보다 바람이 알맞게 불어 주어서 일찍 도착 하였다.

15:20 : 애월 읍민 환영식과 맞추어 잠시 포구 한 가운데서 대기하기로 하였다.

16:00 : 애월항 읍장, 리장단, 풍물패 등 주민들이 100여명 나와서 환영해 주었다. 특히 애월에 거주하는 옛 해병 전우들까지 합세하여 맞아 주었다. 상륙한 부두에서 환영회와 곁들어 막걸리 잔을 서로 부딪쳤다.

 

< 20111031>

08:00 : 아침식사 애월펜션 숙소에서 나왔다. 삼별초호는 대형 크레인 차로 옮겨 육상으로 성산포 시흥포구로 이동하기로 했다.

09:30 : 그동안 함께 생사를 나누웠던 이종호 박사는 이곳에서 헤어져서 서울로 향해 아쉬운 재회를 약속 했다.

이번 탐험 항해에서 삼별초의 호국정신과 나라사랑 그리고 이들의 자주, 자립, 자조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가는데 길잡이가 되리라 기대된다. 또한 이들의 도전의 뱃길은 옛 탐라인의 정체성을 찾는데 중요한 아이콘이라 하겠다. 삼별초가 남긴 역사의 가르침을 배우고 일깨우는 작업들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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