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으로 개국 20일만에 중단한 우정총국
갑신정변으로 개국 20일만에 중단한 우정총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0.0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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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건의로 개설…서울과 지방에 배달망 구획, 우표도 발행

 

서울 안국동 사거리에서 종각 방향으로 우정국로를 따라가다 오른쪽 조계사 입구에 조그마한 건물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우정총국(郵政總局)이다. 이곳은 1984124(이하 양력)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정치적 변란을 별도로 하고라도 우정총국의 개설은 우리나라 근대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우정총국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통신기관이며, 오늘날로 치면 정보통신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우정총국 설치에는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노력이 컸다. 홍영식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40일간 일본의 각종제도를 견학했는데, 특히 우편제도에 주목했다. 그는 1883년에 미국을 방문해 우편제도를 견학하고 고종에게 우정총국의 설치를 건의했다.

고종은 건의를 받아들여 1884327에 우정총국을 설치하고 홍영식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조정은 재래의 역전법(驛傳法)을 고쳐 근대식의 우편제도 법령을 마련하고, 옛 전의감(典醫監) 건물을 보수해서 우정총국 사무실로 이용했다.

직제는 책임자인 총판(總辦)과 방판(幇辦)을 두었고, 그 아래에 315부를 두었다. 그해 5월에 일본인 실무자 2명을 고용했다. 중앙에 우정총국을 두고 각 지방에 우정분국을 두었으며, 먼저 인천에 분국을 설치했다.

우표도 발생되었다. 홍영식은 일본 대장성인쇄국에 주문해 5문과 10문의 태극 문위우표 2종을 발행했다. 문위 우표는 당시 통용화폐인 문()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발행된 우표는 5, 10, 25, 50, 100문 등 5종이며, 발행일은 1884년 음력 101일이다.

 

우정총국 /김현민
우정총국 /김현민

 

우편 배달망을 그린 우정집신분전구역도라는 지도가 전해지는데, 4대문 안의 우표판매소와 집배구역이 그려져 있다. 지도는 경성을 동서남북과 중부 5부로 나누어 우편물을 수집, 배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편함이 설치된 지역은 종로 네거리, 삼간정동 노변, 돈의문 안, 수표교 옆, 진고개 노변, 남대문 안, 재동 노변, 교동 일본공사관 앞, 수문동 철문 앞, 동대문 등이었다. 긱 지역에는 우편함을 설치해 하루 두 번씩 우편물을 모아 배달했다.

 

1884124일 우정총국 개업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 자리에 고종과 당시 실세였던 민씨 일파, 주한외교사절도 참석했다. 공식행사가 끝나고 연회가 이어졌다. 10쯤 누군가가 불이야하고 소리쳤고, 민영익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가 잠시후 피투성이가 되어 연회장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개화파의 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다.

김옥균의 주도로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이 민씨 정권을 제거하고 신정부를 조직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다. 이날 화재로 우정총국 본채를 제외한 부속건물은 모두 불에 탔고, 우정총국의 우편 업무도 중단되었다.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 등 지도층 대부분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홍영식은 고종 곁에 있다가 청군에 살해되었다.

정변의 장소가 된 우정총국은 사건과 함께 개국 20일만에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다. 발행된 우표도 발행 21일만에 사용이 중지되었다.

 

1893년에야 전우총국(電郵總局)이란 이름으로 우편 업무를 다시 시작했다. 1905년 이후에는 한어학교, 중동야학교, 경성 중앙우체국장 관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엔 개인주택이었다가 1972년 체신기념관이 되었다.

 

우정총국 /김현민
우정총국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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