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③…남겨진 한국인들
사할린③…남겨진 한국인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0.03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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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에 자발적 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가…무국적자로 살다가 귀국

 

극동러시아 사할린 섬에는 한인이 3만명 정도 살고 있다. 사할린 인구를 50만명으로 잡는다면, 5~6%에 해당한다. 사할린 인구 구성에 러시아인이 83%쯤 차지하고, 그 다음이 한인들이다. 한인들은 특히 사할린 최대도시이자 주도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밀집해 사는데, 이 도시의 인구 18만명 가운데 12%를 한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100여년 동안 사할린의 복잡한 지정학적 변동과 운명을 함께 해왔다. 그들은 일본인을 따라 강제로 또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사할린으로 건너갔고, 점령자 소련의 방해로 귀국이 차단되었고, 동서냉전 시대엔 국적 없이 지내기도 했다. 이제 그들중 일부는 조국을 되찾았고, 또 일부는 현지에 정착해 살고 있다.

 

2019년 러시아 여성의 날 (주유즈노 사할린스크시 한인회) /사할린한인회 홈페이지
2019년 러시아 여성의 날 (주유즈노 사할린스크시 한인회) /사할린한인회 홈페이지

 

그들의 애환은 20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북위 50°를 경계로 사할린 이남은 일본령이 되었고, 일본은 그곳에 가라후토청(樺太廳)을 설립했다. 최초의 한인 이주는 1910년대 미쓰이 재벌이 광산 운영을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노동자를 채용해 데려갔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해 바다를 건너오면서 1920년대에 남사할린에 조선인 수가 1,000명에 육박했다. 1930년대 중반에 가라후토에는 거주하는 조선인은 6,000명으로 불어났다.

사할린에 조선 사람이 급격하게 팽창한 것은 1941년말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이 사할린에서 본격적으로 전쟁물자 조달하면서다. 일본은 사할린에서 석탄과 석유. 목재를 생산하며 험한 일을 조선인들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사할린에 조선인의 강제징용이 시작되었다. 가장 많을 때 남사할린에 조선인 수가 15만에 이르렀다. 사할린 거주 일본인은 40만에 달했다.

1905~1945년 사할린 분할 /위키피디아
1905~1945년 사할린 분할 /위키피디아

 

2차대전 막바지인 1945811일 소련군이 사할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인 사이에 한인들 가운데 러시아 스파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앞서 1937년엔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와 북사할린(소련령)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일본 스파이 협의를 뒤집어 씌워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바 있다. 나라 없는 백성은 가는 곳마다 간첩혐의에 시달리고 피해를 입어야 했다.

남사할린에서 전투가 격화되면서 일본군의 한인 학살 사건이 보고되었다.

1945818일 카미시스카(지금의 레오니도보)에서 19명의 조선인이 간첩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18명이 경찰서에서 처형되었다. 나카타라는 일본이름을 가지고 있던 나머지 1명의 조선인은 화장실에 숨어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그는 소련이 사할린을 점령한 후에 이를 고발해 세상에 알려졌다.

820~23일 사이에 미즈호 마을(포자르스코예)에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살았는데, 소련군이 진입하자 일본인들이 조선인 27명을 학살했다.

또 일본군인들이 미군 포로를 학살하는 장면을 한 조선인이 목겨했는데, 일본군이 증거 인멸을 위해 그 조선인을 사살했다. 조선인의 부인이 후에 이 사실을 연합군에 증언했다.

일본군은 사할린에서 825일 소련군에 항복했다. 항복 직전에 일본인 10만명이 일본열도로 돌아갔고, 사할린엔 30만명이 남아 있었다. 조선인도 10만 이상 남아 있었다.

전후 소련은 사할린을 일본에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에 소련은 일본에 일본인 송환을 약속했고, 대다수의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조선인도 상당수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43,000명의 사할린에 남았다.

이들이 사할린에 남은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패전국 일본이 일부 조선인의 송환을 거부했다. 일본은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 부모중 한 사람이 일본인인 조선인의 송환을 허용하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새로 독립한 대한민국 또는 북조선이 책임지라고 떠밀었다. 둘째 남사할린을 점령한 소련 당국이 일본인이 떠난 후 생겨난 인력부족의 공백을 조선인으로 채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 점령자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조선인의 귀환을 막았다. 한반도에서 남한과 북한이 독립정부를 수립하고 북한에 친소련 정부가 수립되었다. 남사할린 한인은 대부분 경상도 전라도 출신이어서 남한으로 귀국할 것을 희망했다.

 

소련 통치 초기에 북한 이민자들이 8,000명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일제 때 노동자로 이주한 한인들과 마찰을 빚었다. 소련 당국은 한국어가 가능한 중앙아시아 한인들, 즉 고려인을 사할린에 데려왔는데,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사이에 정서적 괴리도 컸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함경도 출신들이 대부분인데 비해 사할린 한인들은 전라·경상도 출신이어서 두 부류 사이에 언어와 뿌리에 대한 골이 패이게 되었다.

6·25 직후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원활했고, 사할린 당국은 한인들에게 북한 이주를 권했다. 1960년대에 사할린 한인들의 25%가 소련 국적, 65%가 북한 국적을 가졌으나, 10%는 무국적자로 남았다. 당시 대한민국은 소련과 수교를 맺지 않고 있던 상태여서 대한민국으로 귀국하려는 한인은 북한과 소련 국적 취득을 거부했다. 이들은 국제미아가 된 것이다.

 

잔치에 모인 사할린 한인 가족 사진 /위키피디아
잔치에 모인 사할린 한인 가족 사진 /위키피디아

 

1966년 일본인 처의 노력으로 일본으로 귀환한 박노학(朴魯學)은 일본 동경에 화태(가라후토)귀환한국인회를 설립, 사할린 잔류 한국인들의 귀환운동을 전개했다. 또 사할린에서 귀환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탄원서를 접수해 일본 여론에 호소하고 그들의 편지를 모아 한국에 전하며 한국 가족의 편지를 사할린에 전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또 사할린에 거주하는 김영배(金永培)씨가 사할린 경찰서에 귀환을 요구했다. 이에 소련은 한국과 외교관계가 없기 때문에 일본이 받아주면 출국시킬 용의가 있다고 했지만, 일본은 한국이 수용하지 않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고, 한국은 사할린 한국인 문제의 원인이 일본에 있기 때문에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사할린 한인의 귀환에 책임을 져야 할 당사국이 서로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19762,000명의 사할린한인들이 이주허가를 받았으나, 사할린당국은 끝내 한인들의 대한민국으로의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북한이 개입한 이유도 있었다. 북한으로는 1,000명이 이주했다. 그런 와중에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 KAL기 피격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한인들의 귀환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1988년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이들의 고향 방문이 추진되어 일부가 대한민국을 찾았으며, 이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에 정착을 희망해 사할린 교포 정착촌이 조성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세대의 귀환만 지원하고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할린 동포사이에서 태어난 2세 이하 자녀들을 한국인으로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러나 한국법원은 소련국적을 취득하지 않아 사실상 무국적이었던 사할린 한인 사이에서 태어난 2세는 대한민국 국적자라고 판결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귀환한 사할린 동포는 3,500명에 이른다. 202111일부터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됐다.

 


<참고자료>

Wikipedia, Sakhalin

Wikipedia, Sakhalin Kor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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