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⑩…마지막 소명, 대가야 정벌
이사부⑩…마지막 소명, 대가야 정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6 17: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라 망라사방 정책의 주인공…장수와 재상 겸비, 영토확장과 안정에 공로

 

역사서에 이사부(異斯夫)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나오는 대목이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정벌하는 장면이다. 한강유역과 동해안 북쪽에 대해 영토를 확장한 이후 신라의 다음 타깃은 마지막까지 버티던 대가야였다.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에 참여해 주력군을 잃은 후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10여년간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던 이사부가 대가야 정벌에 나섰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진흥왕 23(562) 9,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했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했다.“

사다함은 <화랑세기>에서 미실궁주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제5대 풍월주였다. 그가 죽은 나이는 17. 이사부를 따라 대가야 공격의 선봉에 나설 때 나이는 15. 전쟁의 영웅이자, 당대 최고 여걸인 미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사다함은 오늘에도 드라마, 소설, 만화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사다함을 극찬했다.

진흥왕(眞興王)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국을 습격하게 했는데, 이때 사다함은 십오륙 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했다. 왕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요청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임명했는데,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에게 청해 그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전단량(旃檀梁)(가라의 말로 문을 양()이라 한다)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 막지 못하므로, 대군이 이 틈을 타서 마침내 가야국을 멸망시켰다.

군대가 돌아오자 왕은 그의 공훈을 책정하여 가라 포로 3백을 사다함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받은 즉시 모두 놓아주어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또 토지를 하사하였는데 굳이 사양하였다. 왕이 강권하니 알천(閼川)에 있는 불모지만을 청할 따름이었다.

사다함은 애초에 무관랑(武官郞)과 생사를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했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너무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그 역시 죽었다.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대가야를 함락한 시기에 이사부의 나이는 70대 후반이었고, 기력이 쇠한 나이였다. 가야 가맹국들에겐 이사부는 죽은 제갈공명 격이었다. 마지막 남은 대가야로선 이사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을 게 분명하다. 김부식은 사다함의 용맹 덕에 대가야를 함락하는데 성공했다고 평했지만, 백전백승의 장군 이사부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었기에 대가야가 성문(전단문)을 열고 항복했을 것이다.

공은 사다함이 가져갔다. 노장 이사부가 양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흥왕은 사다함의 공이 으뜸이라고 칭찬하며 땅과 가야에서 획득한 노비 300명을 주었다. 사다함은 끝내 이를 거절하고, 친구 무관랑이 병들어 죽자 함께 죽었다는 애절함이 더해져 이사부의 공이 가려져 있다.

 

고령 대가야 고분군 /김현민
고령 대가야 고분군 /김현민

 

이사부는 대가야 정벌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진다. 아마 진흥왕 말쯤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엔 진지왕 원년(576)에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진평왕 2(580)에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으로 삼았는 기록이 있다. 진지왕이 즉위한 해에 당시 실세였던 거칠부의 나이가 78세였다. 그런 실세를 고령의 나이에 최고 관직인 상대등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진흥왕 말까지 상대등에 버금가는 인물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이사부였을 것이다.

3대 임금에 걸쳐 최고 어른 역할을 했던 이사부가 죽고 나서 거칠부를 최고관직인 상대등을 임명했다고 보면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신라는 상대등 제도를 만든 초기에 종신직으로 운영했다. 상대등은 항시 두는 관직이 아니고, 상대등이 없을 때도 있었다.

이사부가 마지막 기록인 대가야 정벌시, 이찬으로 2등급 관직에 있었지만, 진흥왕 조엔 사실상 상대등에 비견되는 재상의 역할을 했고, 그가 죽은 후에야 거칠부를 새로운 상대등을 임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진흥왕조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진흥왕 33(572) 1020, 전쟁에서 죽은 장수와 병졸들을 위하여 왕성 밖의 절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열어 7일 만에 마쳤다.”

팔관회는 진흥왕 때 개최한 이래 고려에 이어진 일종의 종교행사로, 10월에 열렸다. 산천용신제(山川龍神祭)와 제천행사 등 토속행사와 불교의식과 결합해 종교의식으로 단일화, 대형화한 축제였다. 신라시대엔 팔관회가 전쟁터에서 죽은 영웅호걸과 병졸에 대한 위령제 역할도 했다.

진흥왕은 오랜 영토확장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죽은 장수와 병졸들을 위해 팔관연회를 열어 7일간의 장례행사를 치른다. 이때 거칠부, 김무력과 무력의 형인 세종은 살아있었다. 그렇다면 지증, 법흥, 진흥왕 3대에 걸쳐 신라의 국토 확장을 위해 최고의 공로를 세운 장수가 세상을 떠났고, 그를 애도하는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을 것이다. 그 장수는 이사부였을 것이다. 이때 이사부의 나이는 실직군주로 부임해 갈 때 나이를 20세로 볼 때 87세가 된다.

 

이사부 시기의 신라 영토확장 /김현민
이사부 시기의 신라 영토확장 /김현민

 

이사부는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3대에 걸쳐 신라의 영토를 동서남북 네방향으로 확대하는 망라사방(網羅四方) 정책의 주인공으로 나선다.

실직 및 하슬라 군주 수행(지증왕), 우산국 복속 (지증왕)

도살성, 금현성 점투 (진흥왕)

금관 가야 공격 (법흥왕), 대가야 복속 (진흥왕)

철령 이남 10개군 점령, 옥저 복속 (진흥왕)

이사부의 활약으로 진흥왕 시대 신라는 북으로 함경남도, 서로는 서해안 당항성(경기도 화성), 동으로 울릉도, 남으로 경상남도 가야 관할영역을 모두 차지한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 사이에 존재하며 소국을 경영하던 예국, 맥국, 말갈, 우산국, 가야연맹 소국은 거의 모두가 신라에 흡수되며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본격적인 삼국 혈투의 시대가 개막된다. 아울러 한반도 고대사에 등장하는 말갈과 왜 등의 이질적 종족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잃고 소멸하거나 퇴장한다. 그 역사의 주인공이 바로 이사부였다.

 

<화랑세기>에는 이사부의 딸 숙명이 아버지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존경심은 끔찍할 정도였다. <화랑세기> 12대 보리공조에 숙명이 아들 보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숙명공주가) 한번은 (보리공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 태종 각간은 곧 너의 할아버지다. 하늘도 높다 않고 땅도 넓다 않는 대영웅이다. 너는 마땅히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이사부의 가문에서 후손들은 그를 신으로 격상시켜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국토를 확장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영웅을 넘어 신으로 격상시켰다. 이사부는 부인인 지소태후에겐 존경의 대상으로, 딸은 숙명과 손주에겐 신으로 떠받들어진 것이다. 아마 숙명이 아들 보리에게 훈계한 시점엔 이사부가 이 세상을 하직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이사부 장군 국가영정 /삼척시
신라 이사부 장군 국가영정 /삼척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