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서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을 읽다
용산에서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을 읽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6 19: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쟁기념관에 모형 세워져…비문 내용, 학계의 조언 받아 자세히 정리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입구에 광개토대왕릉비 모형이 세워져 있다. 일단 웅장하다. 실물과 같은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비문 번역은 2005년에 학계의 조언을 받아 이뤄졌다고 한다.

광개토대뢍릉비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비석 중 가장 크다. 높이 6.39m, 무게 37톤의 규모이며 4면에 모두 1,775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그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에 세운 것으로, 현재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위치해 있다. 능비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영토확장은 물론 고구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그곳의 번역문을 모두 인용해 보았다. 역사 공부하기에 좋은 자료다.

 

용산 전쟁기념관내 광개토대왕릉비 /김현민
용산 전쟁기념관내 광개토대왕릉비 /김현민

 

<1>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박()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었다. □□□□□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 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애 내려와서 왕을 맞이 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국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甲寅年) 9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던한다.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4년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 600~700()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 , 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와왔다.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예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중략)

영락(永樂) 6(396)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집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 두노성, □□

 

(2)

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희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이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生口) 1천명과 세포(細布)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700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398) 무술(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 息愼, 肅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巡視)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라성(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帛愼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을 받았다.

영락(永樂) 9(399) 기해(己亥)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400) 경자(更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南居城)을 거쳐 신라(新羅城: 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병(安羅人 戍兵) …… 신라성(新羅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알수 없슴.)

 

(3)

□□□□안라인 수병(安羅人 戍兵)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代)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조공(朝貢)하였다.

14(404) 갑진(甲辰)에 왜가 법도(法度)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연선(連船: 수군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407)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명을 파견하여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벌이며, 그밖의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을 파하였다.

20(410) 경술(庚戌),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구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동부여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 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이 64,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 (의 그 출신자와 호수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민은 국연(國烟)2, 간연(看烟)3(), 동해고(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 간연이 5, 돈성(敦城)의 민()4가가 다 간연, 우성(于城)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壤城民)은 국연 1, 간연 10, 자련(訾連)2가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 간연 43,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22가는 간연, 개곡(改谷)3가는 간연, 신성(新城)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1가는 국연, 새로 약취해온 한()과 예()의 연호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 간연 1, 모루성(牟婁城)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1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 간연 21,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 간연 3, 객현한(客賢韓)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 간연 3,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 간연이 7

 

(4)

야리성(也利城)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 간연이 2,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 간연이 8,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 간연이 5,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 간연이 5, 태산한성(太山韓城)6가는 간연,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 간연이 7,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1, 간연이 22,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 간연이 8, 전성(瑑城)은 국연이 1, 간연이 8, 미성(味城)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1가가 간연, 구모성(勾牟城)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3가는 간연, 세성(細城)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 교()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구민(舊民)들만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 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과 예()220가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와 예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구 수묘호를 합쳐, 국연이 30가이고, 간연이 300가로서, 도합 33가이다.

선조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저 왕들을 위해 묘성(墓上)에 비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광개토대왕 당시의 고구려 영토 /김현민
광개토대왕 당시의 고구려 영토 /김현민
용산 전쟁기념관내 광개토대왕릉비 /김현민
용산 전쟁기념관내 광개토대왕릉비 /김현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