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조선후기 최고 건축물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조선후기 최고 건축물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0.0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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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대원군이 종친부 확대하며 건축…신군부 시절에 이전했다가 복원

 

왕조시대에 왕족은 별도로 대우받았다. 조선시대엔 과거시험을 치고 올라온 문관을 동반(東班), 무관을 서반(西班)이라 하고, 동반과 서반을 합쳐 양반(兩班)이라 했는데 왕실 가족은 별도로 종반(宗班)이라고 했다.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뒤쪽에 팔작지붕으로 된 조선시대 전각 두 동이 있다. 그 건물이 종친부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이다.

종친(宗親)이란 임금의 부계 친척을 말하는데, 종친부(宗親府)는 종친과 관련된 사무를 하던 관청이다. 종친의 문제는 종친부에서 처리하므로, 정부의 조직에서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친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은 정부 부서로 이관되지 않고 종친부에서 처리되었다. 이외에도 종친부는 왕들의 족보(어보), 초상화(어진)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했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왼쪽이 경근당, 오른쪽이 옥첩장이며, 경근당 좌측에 이승당 터가 보인다. /박차영​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왼쪽이 경근당, 오른쪽이 옥첩장이며, 경근당 좌측에 이승당 터가 보인다. /박차영​

 

종친부의 전신은 고려의 제왕자부(諸王子府)와 조선초의 재내제군소(在內諸君所)였으며, 1430(세종 12)에 종친부로 개명되었다.

종친부를 대폭 확대한 사람은 고종 초기에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그는 경복궁을 중건하고 종친부의 권한과 조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종친부 건물을 대규모로 확장했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를 제압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지금 있는 전각은 고종시절인 1866년에 지어졌다. 당시 종친부 시설은 302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종친부에는 대군(大君왕자군·제군(諸君영종정경(領宗正卿판종정경(判宗正卿지종정경(知宗正卿종정경·도정(都正·부정·(부수·(부령·() 등의 계층이 있었다. 이중 당상관 3인은 1품과 2품의 종반(宗班)으로 임명하는 데 종친관계 사무를 통솔하였다.

 

종친부 경근당 /박차영
종친부 경근당 /박차영

 

하지만 대원군 실각 이후 종친부의 기능은 약화되었고, 그후 나라를 잃으면서 종친부는 중심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만 남게 되었다.

해방후 종친부의 두 전각은 보안사령부 내에 들어가 있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던 1981년에는 보안사령부의 테니스장 신축 터로 지목되어 건물이 이전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3년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복원되었다.

그동안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관리되던 경근당과 옥첩당은 202112월에 국가문화재 보물로 격상되었다.

 

종친부 옥첩당 /박차영
종친부 옥첩당 /박차영

 

경근당은 대군, 왕자군 등 종친들의 대청으로 종친부의 중심 건물이다. 좌우로 각각 옥첩당과 이승당(貳丞堂)을 두고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승당은 1950년대 이후 사라졌다.

경근당은 정면 7, 측면 4칸으로 된 이익공의 공포인 팔작지붕 건물이며, 정면에는 넓은 월대를 두었고, 기단과 초석은 모두 다듬은 돌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옥첩당은 정면 5, 측면 3칸으로 된 초익공의 팔작지붕으로, 건축물의 규모나 공포의 형식 모두 경근당보다 격을 낮추어 위계를 두었다.

경근당과 옥첩당은 조선후기 건축물로는 최고급 건축형식과 기술력이 발휘된 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기단과 초석의 가공 방식, 기둥과 공포의 조형, 벽체에 장화반과 운공 사용, 가구의 구성방식 등에 있어서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종친부 이승당 터 /박차영
종친부 이승당 터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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