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엔 한때 러시아인보다 한인이 많았다
연해주엔 한때 러시아인보다 한인이 많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0.1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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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신허 마을에서 출발, 구한말 대규모 이민…독립운동의 본거지

 

만주족은 중원을 통치하면서 언젠가 한족이 일어나 돌아갈 것에 대비해 만주 지역을 비워두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청나라는 이를 봉금(封禁)정책이라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기에 천재지변에다 지배계급의 가렴주구로 궁핍해진 국경부근의 백성들이 만주지역으로 넘어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1858년 아이훈조약,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청나라 영토였던 연해주가 러시아영토로 바뀌었다. 러시아 땅이 되기 전에 연해주에 조선인이 761가구, 5,31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Pohl, J. Otto, 1999)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186312월쯤 첫 조선인인 이민자들이 연해주에 들어갔다. 함경도 무산 출신인 최운보(崔運寶)와 경흥 출신인 양응범(梁應範)이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포시예트(Posyet) 구역에 정착하면서 지신허 마을을 개척했다. 조선인들은 빈 땅에 집을 짓고 살면서 러시아 수비대 초소대장에 정착허가를 요청했다. 연해주 군무지사였던 카자케비치(P. V. Kazakevich)는 수비대에게 한인의 정착을 허가했고, 보호를 약속했다. 그 뒤 지신허 마을을 중심으로 티진헤강 주변에 대한 개척이 본격화했다.

최초 이민자는 13가구 60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함경도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새 영토 연해주에 조선인이 이민온 것을 반겼다. 러시아인들은 수도에서 가장 멀리 있는 연해주로 이주하길 꺼려했다. 시베리아 개척의 첨병이었던 코사크도 연해주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중국인은 땅을 빼앗긴 나라의 사람이고, 조선인들이 와서 땅을 개척해 주는 게 러시아로선 고마웠을 것이다.

이들이 연해주에 처음 개척한 곳이 지선허(地新墟) 마을이다. 원래 지명은 鷄心河였다. 중국 발음으로 티진헤인데, 이를 우리식으로 읽어 지신허라고 했다.

러시아 관리들이 1년후에 이곳에 다시 돌아와 보니 마을에 활기가 있고, 농지가 놀랄만큼 경작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지구촌 어디를 가도 열심히 일했고, 현지에 잘 정착했다. 연해주 이민자도 그러했을 것이다.

 

포시예트의 위치 /위키피디아
포시예트의 위치 /위키피디아

 

함경도 사람들의 연해주행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지신허 마을은 1864년에 60가구 308명이 살았고, 1868년에는 165가구로 늘었다. 1869년에는 766가구가 거주하는 한인 정착촌으로 성장했다. 1882년에는 지신허를 방문한 조선 관료 김광훈과 신선욱에 따르면, 마을은 남북으로 수십 리, 동서로 4~5리 였는데, 집들이 즐비했으며, 기숙학교인 서학서숙(西學西塾)이 있었다고 한다. 1900년대에는 인구가 1,600명을 웃돌았다.

1870년에는 지금의 유대인자치주의 블라고스로베노예에 사만리(四萬里)라는 조선인 마을이 조성되었다. 블라디보스톡 골든혼 지역엔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Kareskaya slabodka)라는 한인 마을이 생겨났다. 한인들은 그곳을 개척리((開拓里)라고 했다. 블라디보스톡 시당국은 이 한인촌을 공인했다. 1897년 인구센서스에 러시아 제국에 조선인 수는 26,005명으로 집계되었고, 이중 남자는 16,225, 여자 9,780명이었다.

 

2004년 가수 서태지가 세운 러시아 한인마을 지신허 기념비 /사진=독립기념관
2004년 가수 서태지가 세운 러시아 한인마을 지신허 기념비 /사진=독립기념관

 

조선인 이민이 급증한 것은 조선 땅에서 먹고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조선말기에 조정은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지주계급은 소작인들을 수탈했다. 백성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함경도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건너갈 곳이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정착민이 필요했다. 멀리 유럽에서 식량을 수송할수 없는 여건이었다. 철도가 놓이기 전의 일이다. 시베리아 북쪽지역은 농사가 불가능하지만, 연해주 남쪽에는 그나마 농사가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조선인들이 농사를 지어 자기네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길 바랬다.

처음엔 조선인 이민자와 러시아인 사이에 이해관계가 맞았다. 1869년 연해주 인구의 20%가 조선인이었고, 시베리아 철도가 블라디보스톡까지 연결한 1905년 직전엔 조선인 수가 러시아인보다 많았다.

조선인들이 늘어나면서 러시아가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러일전쟁(1904~1905)에서 패한 이후 일본은 러시아에 조선인의 이주를 제한해 달라고 요구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요구를 핑계삼아 조선인 이주를 제한했다. 1907년 러시아 당국은 조선인이민법을 강화해 조선인 농부의 토지를 몰수하고 노동자를 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이민의 증가를 막지 못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조선 땅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914년 러시아에 사는 조선인 수는 64,309명이었고, 이중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2109명으로 집계되었다.

 

한국, 북한, 고려인을 의미하는 세 개의 신한촌 기념비 /사진=외교부
한국, 북한, 고려인을 의미하는 세 개의 신한촌 기념비 /사진=외교부

 

1911년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전염병을 핑계로 개척리를 강제로 철거하고, 그곳을 기병대 숙소로 삼았다. 대신에 한인들을 블라디보스톡 서북편 외곽에 새로 설정된 구역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이곳은 개척리로부터 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산비탈인데, 높고 건조하며 아무르만을 굽어보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동서 약 6(), 남북 약 7정 규모의 비교적 넓은 면적이었다. 이 일대는 자갈이 섞였으나 대체로 잡초가 무성하고, 중국인들은 밭에 무·파 등 채소를 심었다. 한인들은 그 곳에서 다시 피땀을 흘려 신개척리를 건설,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의미로 신한촌’(新韓村)이라 명명했다.

19115월말 신한촌에는 50가구 정도의 신축가옥이 들어섰고, 8월엔 313호로 늘어ᄂᆞᆻ다. 그 후 1915년에 신한촌 한인수는 약 1만 명에 달했다.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은 신한촌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신한촌에는 이범윤(李範允홍범도(洪範圖유인석(柳麟錫이진룡(李鎭龍) 등의 의병장을 비롯해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했다. 헤이그 특사로 임명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은 물론 북간도 용정촌(龍井村)과 서간도 삼원포(三源浦)에서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던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정재관(鄭在寬이강(李剛김성무(金成茂) 등이 이곳에 일차로 집결했다.

민족사학자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도 이곳에 있었으며, 이동휘(李東輝), 백순(白純) 등 종교인, 최재형(崔在亨최봉준(崔鳳俊문창범(文昌範김학만(金學萬) 등도 1910년대에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는 신한촌 외곽 약 1km 지점에 영사관을 두고 항일민족운동의 동태를 감시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신한촌의 한인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신한촌은 만주에서 일어난 무장투쟁의 거점이기도 했다. 1920년 청산리대첩에서 독립운동가들은 블라디보스톡에 집결한 체코 부대에게서 병기를 사 독립군에 보급해 일본군과 대항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톡이 1920년에 볼셰비키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한인 사회도 공산치하로 넘어갔다. 독립운동도 1921년 자유시사변을 계기로 러시아 땅에서 무장해제당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Koryo-sara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신허(地新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한촌(新韓村)

모피로드, 윤성학 케이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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