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②…버려진 사람들
고려인 강제이주②…버려진 사람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0.17 13: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죽음의 이동 끝에 카자흐, 우즈벡에 도착…잡초처럼 살아난 고려인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의 부하들이 연해주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 이유는 고려인들의 자치 요구를 차단하고, 행여 일본 식민지가 된 본국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것이었다. 연해주와 그 주변의 하바로프스크, 오호츠크애 고려인이 한명도 살지 않도록 하는 인종청소 작전은 17만명 고려인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19379월부터 두달간 단행된 고려인 강제이주는 6,400km. 지구 둘레의 6분의1에 해당하는 거리에서 진행되었다. 한달 이상 폐쇄된 공간에서 이동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렸다.

한 편의 열차는 객차 50, 위생객차 1, 식당차 1량 등으로 구성되었다. 객차는 이층칸으로 되어 있었고 객차마다 난로가 하나씩 있었는데 시베리아의 매서운 추위를 막아주진 못했다. 하나의 객차에 5~6가구, 30명 정도가 배치되었다. 가축도 함께 타도록 허용되었다. 화장실도 따로 없었다. 긴 이동 기간에 좁은 공간에 갇혀 살아야 했기 때문에 객차 안의 위생 상태는 불결했다. 식수도 부족했고, 의료 지원은 거의 없었다. 고령자, 질병이 있는 사람은 버티지 못했다. 이주 과정에서 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소련 당국은 고려인 사망자에 대해 장례도 치러주지 않았다. 열차를 이동해야 하므로, 객차에서 빨리 시체를 빼라고 붉은 경찰은 요구했다. 시베리아 철도 역사에 고려인 시체가 던져졌다. 소련인들은 묘비명도 꼽아주지 않고 묻어버렸다.

이주비로 가족당 평균 6,000루블을 주고 카자흐와 우즈벡의 허허벌판에 그들은 버려졌다. 어느 고려인은 이렇게 증언했다. “1031일 열차에서 내렸어요.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5~6일을 차가운 들판에서 지냈습니다. 현지 관리들은 고려인 이주자에 대해 아무런 계획도 없었습니다.”

소련당국은 고려인 이주지로 당초 7곳을 염두에 두었다가, 44곳으로 확대했다. 한 곳에 모아 놓으면 결집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일 것이다. 17만명 가운데 카자흐에 10만명, 우즈벡에 7만명이 내렸다. 그곳에서도 분신시켰는데, 타슈켄트에 37,321, 사마르칸트에 9,147, 페르가나에 8,214, 화레즘에 5,799, 나만간에 972명을 내려놓았다.

고려인들은 현지에서 찬밥 신세였다.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한 고려인들은 현지인에게서 살던 곳을 버리고 왜 여기에 왔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초기 정착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의 매서운 겨울바람에 죽어 나갔다. 의료시설은 전무했다. 장티푸스와 말리라아는 무방비의 고려인을 수시로 습격했다. 얼마나 죽었는지에 대한 통계조차 없다. 어림잡아 16,500명에서 5만명까지 추정범위가 광범위하다. 이주인구의 10~25%에 해당한다.

 

1937년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고려인들 /위키피디아
1937년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고려인들 /위키피디아

 

한국인들은 곤경에 처하면 잡초 근성을 발휘한다.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들은 바람을 피할수 있는 곳이면 어디로든 몸을 피했다. 버려진 군대막사, 감옥, 창고로 들어가 바람을 막았다. 몇푼 주지 않은 이주비는 집 짓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다 뜯겨 버렸다.

고려인들은 콜호즈라는 집단농장을 조직해 빈 땅을 경작했다. 고려인 스스로 조직한 콜호즈는 1938년 현재 59개로 18,649개 가정이 참여했고, 205개 가정은 현지의 기존 콜호즈에 참여했다. 그들은 콜호즈 우두머리에게 우선 기아를 해결하게 해달라, 먹을 물을 달라고 했다. 의약품은 절대로 모자랐다.

그곳에도 인정은 있었다. 우즈벡, 카자흐인들이 자신들도 넉넉하지 못하면서 고려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그걸 얻어먹으며 그들은 목숨을 부지했다. 그렇게 해서 고려인들은 낯 설고 물 설은 곳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면 소련은 왜 고려인의 정착지로 중앙아시아를 선택했을까.

농업집단화 정책으로 카자흐와 우즈벡 공화국에 인구가 급감함에 따라 소련은 중앙아시아 지역에 인구를 공급,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한 노동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1931-1933년에 전염병이 돌아 카자흐스탄의 경우 200만명 정도의 인구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극도의 인력 부족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부족한 노동력을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으로 채웠다는 것이다.

앞서 1928년에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 공화국으로 초청된 농업전문가들이 이미 이주해 활동하면서 벼농사를 성공시킨 사례가 있었다. 소련은 농업기술을 가진 극동 거주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의 농업생산력 향상을 위해 적합한 인종으로 판단한 것이다.

또 중앙아시아는 일본 또는 조선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일본이 소련 영토내 고려인을 선동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다.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할 경우를 미래 대비했다는 견해다.

어쨌든 일본은 연해주 고려인의 강제 이주에 대해 소련에 항의했다. 일본의 주장인즉, 조선은 일본의 영토이고, 소련의 고려인들은 자국 이민자이므로, 그들에 대한 강제이주는 불법이라는 것이다. 소련 당국은 일본의 주장을 묵살했다. 소련의 고려인은 소련인이며, 그들의 이주는 일본이 간섭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카자흐스탄 한국어센터의 한국어 수입(2010) /위키피디아
카자흐스탄 한국어센터의 한국어 수입(2010) /위키피디아

 

고려인의 강제이주는 스탈린이 2차 대전 중에 여러 민족을 인위적으로 분산시킨 조치의 선행 실험이었다. 2차 대전 중인 1940년대 초반, 소련은 수십 개의 소수민족 330만명 이상을 삶의 터전에서 뽑아내 이주시켰다. 크림반도의 타타르족은 거주지 자체가 없어졌다. 스탈린은 그 실험을 고려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다.

스탈린 사망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탈스탈린화를 추구하면서 1956년에 민죽 강제 이주를 사과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포괄적인 강제성을 사과했을 뿐 고려인에 대한 구체적인 사과를 적시하지 않았다.

1957~58년 고려인들은 소련 정권에 과거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복권시킬 것을 요구했다. 1982년 마침내 유리 안드로포프 당서기장은 소비에트 고려인을 적시하며, 대등한 자결권 없이 살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미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내린 뒤였다.

소련이 해체된 후 고려인들은 각 독립국으로 분산되었다. 옛소련 영토에는 고려인 수가 50만명에 이르는데, 우즈베키스탄에 가장 많은 17만명, 러시아 15만명, 카자흐스탄 10만명, 우크라이나 5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들은 고려인 또는 고려사람이라고 스스로 규정한다.

 

소련 해체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 극동시베리아로 되돌아길 것인지를 조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에서 정착해 잘 살고 있고, 소련의 연해주 당국이 고려인의 복귀를 원치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남한으로 돌아올 것도 고려했지만, 현실의 상황은 녹녹치 않았다. 고려인의 대규모 본국 이주는 없었다. 8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들은 이제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데니스 텐의 기억>

고려인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카자흐스탄의 국가대표 피겨선수 데니스 텐(Denis Ten, 1993~2018)이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에 일본에 항거한 의병대장 민긍호 선생의 후손이다.

1908229일 민긍호 선생이 원주에서 일본 군대를 만나 전투를 벌이던 중 순국하고, 그의 가족들은 급히 몸을 피해 만주로 피신했다. 안중근 의사j가 민씨 가족들을 돌보아 주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자 가족들은 다시 몸을 피해 러시아 땅 연해주로 피신했다.

연해주에서의 삶도 고단했다. 장군의 부인 혼자 가정을 꾸려야 했다.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 한인을 기차에 태워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부인은 가족을 이끌고 열차를 탔다. 열차는 음식도 물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오랫동안 힘겨운 이동이었고, 고난의 여정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죽었고, 데니스 텐의 할머니는 이때 동생 5명을 잃었다.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 이 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카자흐스탄에서 민긍호 장군의 아들 민영욱씨는 안톤과 레오니드, 세레나, 알렉산드라 등 22녀를 뒀고 현재 두 딸과 그 후손들이 50여 가구를 이루고 있다. 데니스 텐은 세레나씨의 외손자다.

데니스 텐은 1993년 카자흐스탄의 대도시 알마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씨 텐(Ten)은 한국의 정()씨를 러시아어에서 쓰는 키릴 문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는 피겨 선수로 성공해 2013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며, 카자흐스탄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입상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해, 카자흐스탄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 2015년 대한민국에서 열린 4대륙 선수권 대회에서는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오른발 인대를 다쳤으나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불참할 수 없다며 참가를 강행하기도 했다.

2018719일 데니스 텐은 알마티 시내 교차로에서 자신의 자동차 백미러를 훔치려던 자들의 칼에 찔려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끝내 사망했다. 25세였다.

 

데니스 텐 /위키피디아
데니스 텐 /위키피디아

 


<참고한 자료>

Wikipedia, Deportation of Koreans in the Soviet Union

Wikipedia, Koryo-saram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려인강제이주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원인 및 과정, 이원용(동국대) 2011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