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증왕②…덕업일신 망라사방
지증왕②…덕업일신 망라사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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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주군현제, 우경실시, 순장제도 폐지, 우경 실시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정권은 정통성이 취약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강력한 개혁, 개방조치를 취해야 한다. 선진국 문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지지기반을 확보할수 있다.

지증왕이 즉위초기에 개혁조치를 과감하게 취한 것은 쿠데타 정권으로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배권력 내부의 갈등을 딛고 권력을 잡았기에 지배층 내부보다는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치를 적극 취했다. 민중과 손잡고, 지배집단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들이 지증왕조에 행해진다.

 

지증왕은 집권 초기에 체제 정비에 나섰다.

개혁 군왕은 즉위 3년에 백성들의 말 못할 고통의 하나인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소를 몰아서 밭갈이(牛耕)하는 법을 개발해 농사를 권장했다.

아울러 지증왕 6년에 스므살 밖에 되지 않은 이사부로 하여금 동해 해상세력의 중심지인 삼척의 통치자로 보내고, 그해에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해 해양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한다.

4(503) 국호를 신라(新羅)라고 정하고, 임금의 호칭을 왕()으로 정했다.

 

신하들은 아뢰었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고도 하고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칭했습니다. 저희들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德業日新)’는 뜻이고 ()’사방을 덮는다(網羅四方)’는 뜻이므로 신라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또 옛부터 나라를 가진 이는 모두 ()’()’을 칭했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으로 칭했고, 존엄한 호칭을 정하지 못했으니, 지금 여러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임금이 이 말에 따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인의 얼굴.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2010호) /문화재청
신라인의 얼굴.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2010호) /문화재청

 

지증왕은 신라(新羅)라고 정한 국호 속에 나라의 비전을 담았다. ‘()’에서 내치(內治)를 의미하는 덕업일신(德業日新)의 뜻을 담았고, ‘에서 외치(外治)에 해당하는 망라사방(網羅四方)’의 의미를 녹였다.

지증왕의 덕업일신 정책은 순장제 폐지, 우경(牛耕)실시, 주군현(州郡縣)제 실시등으로 나타난다.

순장(旬葬) 제도 폐지는 백성과 손잡고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순장은 임금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함께 묻는 제도였는데, 이는 흉노족의 풍습이다. 또다른 흉노계열로 파악되는 가야국에서는 마지막 왕까지 순장을 치렀는데, 신라는 가야에 비해 앞서 살아있는 목숨을 매장하는 비인간적인 제도를 폐기한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죽은후 (BC 210)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병사와 말의 모형을 흙으로 빚어 실물 크기로 제작한 병마용을 매장토록 지시했다. 중국에서도 국왕이 죽으면 섬기던 가신이나 병사도 따라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지만, 시황제는 국력 쇠퇴를 우려해 병사들과 꼭 닮은 인형(병마용)을 만들게 하여 매장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경주월성의 석빙고 /김현민
경주월성의 석빙고 /김현민

 

우경은 소를 몰아서 밭을 가는 농법으로 지증왕때 처음 사용됐다. 이전까지는 쟁기질을 두사람이 했다. 사람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쟁기를 잡고 따라가는 방식이다. 우경 제도를 실시하면서 노동력이 절감되는 것뿐 아니라, 소의 힘을 이용할수 있어 농사일이 훨씬 수월해 진다.

우경이 실시됐다는 사실은 무기로 사용되던 철이 농사용으로 이용돼, 괭이, 호미의 단계에서 쟁기 단계로 넘어가고, 철의 강도도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쟁기의 모양도 사람이 끌던 때와 달라진다. 소가 끄는 쟁기는 사람이 끌때보다 넓고 두터워진다.

소의 힘을 이용함에 따라 사람의 힘으로 농지를 개척할 때보다 험한 땅도 농지로 전환할수 있게 된다. 농경시대의 우경 실시는 근대의 산업혁명과 같은 역할을 했다. 소로 쟁기를 끌면 인력으로 농사를 지을때보다 소출이 2~3배로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원시 농경시대에 우경은 일종의 농업혁명인 셈이다.

우경은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경지 면적을 혁명적으로 넓힐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토지와 소, 쟁기등 생산수단을 가진 유산계급(지주층)과 땅과 생산도구가 없는 무산대중의 계급분화가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에 앞서 우경을 실시함에 따라 삼국 가운데 가장 높은 농업생산력을 확보하게 됐다. 농업 생산력이 높으면 인구가 늘고, 병력자원이 많아진다.

경제사적으로 볼 때 신라의 팽창의 원동력이 농업 신기술의 개발에 있었다고 평가할수 있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먹고도 남은 잉여농산물이 생겨나고, 다른 사람의 농산물과 교환하는 시장이 생겨난다.

신라에서는 소지왕 12(서기 490)에 처음으로 서라벌에 시장을 열어 물자를 유통시켰다. 이어 지증왕 10(서기 509) 서울 동쪽에 시장을 설치했다. (삼국사기)

우경을 실시하고 농업생산력이 급증함에 따라 서라벌에 한 개이던 시장이 두 개로 늘어났다는 얘기다. 철을 화폐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데, 우경 실시와 시장 확대로 곡물이 화폐 역할을 하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지증왕은 내치의 일환으로 상복(喪服)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시행하고, 처음으로 담당관에게 명해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 (경주월성에 석빙고가 있다.)

아울러 가뭄이 들에 백성이 굶주리자, 국가의 창고를 풀어 구제했다. 지증왕은 백성을 배불리 하는데 힘을 쏟은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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