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자락에 초라하게 자리잡은 연산군 묘
도봉산 자락에 초라하게 자리잡은 연산군 묘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0.19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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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신씨의 노력으로 강화에서 이묘…주변에 6백년 은행나무, 원당샘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도봉산 자락에 연산군 묘가 있다. 왕릉으로는 초라하다.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니 무덤의 급도 낮다. 왕자와 동격인 군()의 무덤에 격을 맞추었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은 조선 제10대 왕으로 1494년에서 1506년가지 11년간 재위했다.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즉위 초에 사치풍조를 잠 재우기 위해 구체적인 금지 조항을 만들어 단속하고,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새롭게 정비했으며, 비융사를 설치해 철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생산하는 등 국방정책에도 힘을 썼다.

하지만 즉위후 얼마 가지 않아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사된 콤플렉스에 매몰되어 폭정을 일삼았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통해 사람파와 척신파를 죽이고, 사치와 향략을 일삼았다. 그의 악행은 1506년 사대부의 쿠데타로 마감하고(중종반정), 그는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폐되었다. 그후 두달만인 11월에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의 무덤은 유배지인 강화도에 조성되었다.

부인 신씨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로서, 연산군의 폐왕과 함께 폐비가 되었다. 신씨는 연산군이 죽은 뒤 묘를 강화에서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로 이장하기를 요청했는데,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인 중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15132월 연산군 묘는 원당리로 옮겨져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이장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곳이 지금의 서울 도봉구 방학동이다.

 

연산군 부부묘 /박차영
연산군 부부묘 /박차영

 

연산군 묘에는 무덤이 다섯 개 있다. 맨 위의 두 개가 연산군 부부묘다. 좌측이 연산군, 우측이 부인 신씨의 묘비다. 그 아래 것이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묘이고, 맨 아래에 연산군 딸과 사위의 묘가 있다.

딸과 사위의 묘는 이해되는데, 태종 후궁의 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이 묘역은 본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다.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 태조의 후궁 성비 원씨와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제사를 떠맡았다. 성비 원씨가 세상을 떠나자 다른 곳에 묘를 조성했고, 1454년 의정궁주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 자리에 묘를 쓴 것이다. 이후 이 묘역에 연산군의 묘가 들어선 것이다.

묘의 시설은 대군으로 예우해 봉분·곡장·혼유석·장명등·향로석·재실 등이 갖춰져 있으나, 병풍석·석양·석마·사초지·문인석 등은 세우지 않았다. 연산군의 묘비 전면에 燕山君之墓’, 뒷면에는 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부인 신씨묘의 전면에는 居昌愼氏之墓’, 뒷면에 六月二十六日葬이라 새겨져 있고, 연도 부분은 마멸되어 있다.

연산군 묘는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1991년 국가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장소가 협소하고 주차장, 화장실 등 관람에 따른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묘역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연산군묘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개인적인 관람을 원하는 시민들이 증가하면서 2006년 정부가 문화유산의 가치를 올바르게 알리고자 개방했다.

 

방학동 은행나무 /박차영
방학동 은행나무 /박차영

 

연산군 묘역 아래에는 600년된 방학동 은행나무가 있다. 연산군이 태어나기보다 100년도 더 전에 심어진 나무다. 나무 높이는 25m, 둘레는 10.7m. 서울시 보호수 서10-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립산림과학원의 과학적 수령조사 결과 550±50년으로 측정되었다. 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서울시 소재 수목 중에서 최고령에 해당하는 천연기념물 제59서울 문묘 은행나무다음으로 수령이 오래된 것이다.

예로부터 마을 주민들이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겼다. 경복긍 증축 당시 징목 대상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흥선대원군에게 간청해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감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방학도 주민들은 1990년대말 이후 매년 정월 대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원당샘 /박차영
원당샘 /박차영

 

은행나무 옆에는 원당샘이 흘러 나온다. 이곳은 600년전 파평윤씨 일가가 원당마을에 정착해 자연부락을 이루고 살 때부터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마을 이름을 본떠 원당샘이라 했다. 수질이 깨끗해 음용적합 판정을 받고 있다.

 

정의공주의 안맹담의 묘 /박차영
정의공주의 안맹담의 묘 /박차영

 

연산군 묘역에서 큰 길을 건너면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이 있다. 양효공 안맹담(良孝公 安孟聃)은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의 남편이다. 공주와 사위 무덤이 연산군 무덤보다 깔끔하고 잘 정비되어 있다.

안맹담은 세종 10(1428)에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가 되어 죽성군이 되었고, 세종 14(1432)에는 연창군에, 세조 3(1457)에는 원종공신이 되었다.

묘는 정의공주와 쌍분으로, 봉분 2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 앞에 석등과 4기의 문인석이 있다. 묘역 아래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의 거북조각과 머릿돌에 새겨진 두마리의 용조각은 매우 뛰어나면서도 정교한 편이다. 비문은 정인지가 지었고 글씨는 안맹담의 넷째 아들 안빈세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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