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가 노닐던 곳에 세워진 도봉서원
조광조가 노닐던 곳에 세워진 도봉서원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0.20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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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은 서원, 임금이 편액 하사…경국사 절터에 세워져

 

서울지하철 1호선과 7호선이 만나는 도봉산역에 내려 도봉산 산행길을 2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계곡 옆 경치 좋은 곳에 도봉서원 터가 나온다. 지금은 서원을 복원 중이어서 펜스를 쳐놓았고, 그 안에 옛사람들이 세워 놓은 비석이 보인다. 이 곳은 조선 중종 때 사림파를 이끌고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자주 찾았으며, 그에 앞서 영국사(寧國寺)란 절이 있었던 곳이다.

조광조가 죽은지 50여년쯤 지난 1573(선조 6), 그를 따르는 양주목사 남언경 등이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이 곳에 서원을 지었으니, 도봉서원(道峯書院)이다. 유림들은 이곳에 조광조를 모셨고, 선조는 친히 '도봉‘(道峰)이라는 편액을 써서 내려주었다. 임금이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한 서원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한다. 국왕의 후광을 업은 사액서원이라는 점에서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 와서 시문을 남겼다.

 

도봉서원 터 /박차영
도봉서원 터 /박차영

 

임진왜란 때 사당과 강당이 불타는 등 피해를 입기도 했다.

숙종 때에는 송시열의 위패도 모셨다. 그러나 경종 때 소론이 집권하면서 퇴출시켰다가 영조 말에 다시 모셨다. 이때 영조가 선조처럼 편액을 써서 내려주었다.

매년 음력 310일에는 춘향제, 910일엔 추향제를 지냈고, 이때엔 전국 유림가 지역유지가 모여 전통향사를 지냈다.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목이었던 곳이 서울로 편입되면서, 현재 서울 행정구역 내에 유일한 서원으로 남아 있다.

도봉서원 앞 계곡에는 다양한 형태의 수석들이 산재해 있는데 이 곳에는 이름난 유학자들이자 명필가였던 송시열, 송준길, 권상하, 이재, 김수증 등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도봉서원의 진입부에 있는 도봉동문(道峯洞門) 바위에서부터 도봉서원 상부 복호동천(伏虎洞天) 바위까지는 총 11개 바위에 14개의 글씨 또는 싯귀가 새겨진 바위(刻石)가 분포하고 있다.

 

도봉서원 앞 계곡에 ‘고산앙지’(高山仰止)라고 쓰인 각석 /박차영
도봉서원 앞 계곡에 ‘고산앙지’(高山仰止)라고 쓰인 각석 /박차영

 

서원 앞 개울 바위에 새겨진 고산앙지;(高山仰止)란 글귀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것으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김수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사모한다는 의미에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도봉서원은 대원군 때인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유적의 대부분이 멸실되었다. 하지만 서울 지역 내 다른 서원과 달리 사당의 기단과 각석군(刻石群)이 서원 터 앞 계곡에 대부분 원형대로 남아 있어 유적의 경계를 비교적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유적 이외에도 각종 문헌이나 시에서 오랫동안 경치가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히던 경승지였으므로 2009년 서울시는 도봉서원과 각석들을 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복원을 위해 허물기 전의 도봉서원 /문화재청
복원을 위해 허물기 전의 도봉서원 /문화재청

 

도봉서원은 현재 복원사업이 추진 중에 있다. 2011년부터 20196월까지 3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서원의 배치 등에 관해 역사적 고증을 마쳤고, 이를 토대로 도봉서원 터 종합정비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복원 규모는 4,129이며,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해 정로사(사우), 의인재(동재), 습시재(서재), 계개당(강당) 등 주요시설 및 세부시설을 확정하고 복원 및 활용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복원사업이 완료되면 춘추향제의 전통 제향과 청소년 예절교육 등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 주변 문화관광 자원과 연계한 문화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도봉서원은 영국사라는 절 터에 지었기 때문에 발굴 과정에서 불교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2012년 도봉서원의 중심건물지로 추정되는 제5호 건물지에서 금동금강저 11, 금동금강령 11, 청동현향로 11, 청동향합 11, 청동숟가락 33, 청동굽다리그릇 11, 청동유개호 11, 청동동이 11점 등 총 1010점이 수습되었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절터에 서원을 지은 것이다. 이 곳에서 출토된 불교유물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김수영 시비 /박차영
김수영 시비 /박차영

 

서원 터 바로 인근에 저항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시 가운데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구절이 시인의 육필로 음각되어 있다.

 

광륜사(신정왕후 별장터) /박차영
광륜사(신정왕후 별장터) /박차영

 

서원터에서 조금 내려오면 광륜사라는 절이 나온다. 이 절은 원래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즉 조 대비가 별장으로 사용하며 기도하던 터였다. 신정왕후는 순조의 며느리이자 효명세자의 부인으로 헌종을 낳았다. 신정왕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대왕대비로서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고종 즉위후 1866(고종 3)까지 수렴청정을 했다.

고종 때에는 흥선대원군이 이 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6·25 전쟁 때엔 미군 숙소로 이용되었고, 이후 매각되어 2001년에 금득사란 개인사찰이 설립되었다가 2002년에 광륜사란 절이 들어섰다. 광륜사 삼성각에는 신정왕후 초상과 영가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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