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향교는 강서구에 있다…서울 유일의 향교
양천향교는 강서구에 있다…서울 유일의 향교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0.22 1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00년 된 향교…궁산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정선이 그림 그리던 경승지

 

양천향교는 서울 양천구에 있지 않고 강서구에 있다. 이곳의 행정구역은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천현이었고, 1914년 김포군 가양리, 1963년에 서울시로 편입해 영등포 가양동이었다가 1978년 강서구 가양동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양천향교의 명칭은 조선시대 지명을 이어받은 것이다.

조선시대엔 한양에 성균관과 사학을 두고, 향교는 지방에 설치한 교육기관이었다. 현재 전국에 234개의 향교가 남아 있는데, 양천향교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서울에 남은 유일한 향교가 되었다.

 

홍살문에서 본 양천향교 /박차영
홍살문에서 본 양천향교 /박차영

 

양천향교는 1411(태종 11)에 창건되었으므로, 600년이 넘었다. 갑오개혁(1894)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됨으로써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문묘 기능만 허용되었다. 1981년 노후화된 건물을 전면 수리, 복원되었으며,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을 비롯, 명륜당(明倫堂), 전사청(典祀廳), 동재(東齋),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8개 동이 있다. 현재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석전(釋奠)대제을 봉행하고 있다. 석전제는 지방수령이 올리는 것이므로, 강서구청장이 초헌관(初獻官)으로 제를 올린다.

제일 위에 위치한 대성전은 동양의 5성인, 송나라 4현인, 우리나라 18현인을 모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5성은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이고, 송조사현은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를 말하며, 우리나라 18현은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쳐하며 공부하는 기숙사이며, 전사청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음식물을 준비하고 집기를 보관하는 장소다.

 

양천향교 전경 /박차영
양천향교 전경 /박차영

 

향교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문을 지나면 비석들을 모아 놓아 놓았는데, 양천현을 거쳐간 수령들의 공덕비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선정비를 한 곳에 모아 두었다고 한다.

 

양천향교 앞 선정비 /박차영
양천향교 앞 선정비 /박차영
양천향교 명륜당 /박차영
양천향교 명륜당 /박차영

 

역대 양천현감 가운데 유명한 사람은 겸재 정선이다. 그는 1740(영조 16)에 이곳 현감으로 부임했는데, 그때 나이가 여순다섯이었다. 정선은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친구 이병연으로부터 한시 편지를 받았다. “홀로 떨어져 있다 말하지 말게/ 양천에 흥이 넘칠 터이니라는 시를 읽고 정선은 바로 붓을 들어 양천의 풍경을 그려 이병연에게 보냈다. 둘은 한양에서 헤어지면서 이병연이 시를 써서 보내면 정선은 그림을 그려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오간 시와 그림을 모은 것이 유명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이 화첩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선의 그림 33점과 이병연의 시가 들어 있다.

양천(陽川)은 햇볓이 잘 들고 물이 맑은 고장이란 뜻이다. 정선은 양천의 수려한 풍광을 담아 양천 8을 화첩으로 남겼다.

 

경교명승첩 /문화재청
경교명승첩 /문화재청

 

양천향교 뒷산은 해발 76m의 궁산(宮山)이다. 이 산은 한강과 지류인 안양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삼국시대에는 파산(巴山)이라고 했고, 산성이 있다해서 성산(城山)이라고도 했다. 궁산이라는 명칭은 산자락에 있는 양천향교에서 공자의 위패를 모시기 때문에 궁()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산 정상부 /박차영
궁산 정상부 /박차영

 

궁산에는 산성이 있었다. 산성은 정상부에서 동~서쪽으로 뻗은 주능선과 남~북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의 상단부를 에워싸서 축조한 테뫼식이다. 이 산성은 한강하류에서 한양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성 북쪽은 한강 쪽으로 경사가 급하고 남쪽은 급하지 않은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산성의 길이가 약 220이며 면적은 29,370(8,900)라 한다. 성에 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등 옛 문헌에 남아있다. 성벽의 흔적으로 벽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은 돌인 적심석과 성돌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이 성에 머물다가 한강을 건너가 행주산성에서 크게 이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행주산성(사적), 파주 오두산성(사적)과 더불어 옛날부터 한강 강어귀를 지키던 중요한 시설이었던 곳으로 의의가 크다. 한국전쟁 때도 군부대가 주둔했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궁산 산성이 있던 곳 /박차영
궁산 산성이 있던 곳 /박차영

 

궁산은 서쪽의 개화산, 오른쪽의 탑산, 쥐산 등과 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었다. 예로부터 선비들이 한강 뱃놀이를 즐기는 곳이었다.

정상에는 중국의 동정호의 누각 이름을 본딴 악양루(岳陽樓)가 있었지만 소실되었고 영조 때인 1737년 그 자리에 소악루(小岳樓)가 세워졌다. 겸재 정선(鄭敾)이 이곳 현감으로 부임해 매일 소악루에 올라 한강의 풍광에 취해 뛰어난 산수화 작품을 남겼다. 소악루는 그후 소실되고 1994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1977년 궁산은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소악루 /박차영
소악루 /박차영
소악루에서 본 한강 /박차영
소악루에서 본 한강 /박차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