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석꾼 전형필은 낡은 간송옛집만 남겼다
십만석꾼 전형필은 낡은 간송옛집만 남겼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0.23 10:0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재산 털어 문화재 수집에 쓰고 무덤과 재실만 남아…재단장해 문화재로 보존

 

전형필은 일제강점기에 수탈되어가는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 수집하고,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를 되찾아 민족문화유산을 수호했던 분이다. 그가 세상을 뜬지 60년이 되었지만, 그가 살던 가옥이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남아 있다. 이곳엔 전형필(1906~1962)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다.

 

전형필 가옥 내부 모습 /박차영
전형필 가옥 내부 모습 /박차영

 

방학동의 전형필 가옥은 아버지 전명기가 인근 농장과 경기북부, 황해도에서 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1890~1900년대 건립한 집이다. 가옥 뒤에 전형필과 전명기의 묘역이 있다.

한국전쟁 때 훼손되었지만 전형필 사후에 종로 4가에 있던 본가가 철거되면서 나온 자재로 수리가 이뤄졌다. 재건 이후 전명기와 전형필의 제사 때 재실로 사용되었다.

2013~2015년 간송미술문화재단과 도봉구가 퇴락한 본채와 부속건물, 주변 담장을 보수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본채 규모는 정면 4, 측면 3칸이고, ㄱ자 구조다. 본채 넓이는 91, 굴뚝 2, 화장실 5, 담장의 길이 77. 협문 2개가 있다. 소유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다.

 

간송옛집 현판 /박차영
간송옛집 현판 /박차영

 

정문에 간송옛집이란 한글편액이 붙어 있다. 본채에 옥정연재(玉井硏齋)라는 이름의 서재가 달려 있다. 우물에서 퍼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 글씨를 쓰는 집이란 뜻이다.

전형필의 자취가 남아 있는 장소로 문화적,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다. 게다가 100여년이 된 전통한옥으로서 건축적 가치도 크다.

이 가옥은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전형필 가옥 외부모습 /박차영
전형필 가옥 외부모습 /박차영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은 증조 때부터 종로4가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석 부잣집의 상속권자로 태어났다. 조선시대에 천석꾼도 부자라 했는데, 그는 만석꾼을 넘어 십만석꾼의 아들이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법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 일제 식민통치 하에 말살되어 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우리 민족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이 소실되지 않도록 한 곳에 모아 보호해야 한다는 각오로 오세창(吳世昌)을 따라다니며 민족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에 힘입어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문화재 수집에 아낌없이 썼다. 1934년 당시 한적한 교외였던 성북동에 부지를 확보하고, 1938년에 보화각(葆華閣)을 건축,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했다. 그는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으면서도 문화재 수집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겸재 정선의 그림은 물론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 조선시대 그림과 서예작품을 두고 수집했다.

1940년 동성학원을 설립,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해 육영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고, 문화재보존위원에 선출되기도 했으나 가급적 공직에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1962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해 815일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추서되고, 196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redheat 2022-10-26 15:48:55
존경합니다 간송 전형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