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적성비’에 등장하는 신라인들
단양 ‘적성비’에 등장하는 신라인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8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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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비차부, 무력 등 6세기 신라 무장들…깨진 글자가 거칠부인듯

 

55번 중앙고속도로 상행선을 따라가다 단양휴게소를 들르면 휴게소 뒤편에 비각을 만날 수 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적성비(赤城碑).

비석 앞에서 눈을 들면 야트마한 산(성재산)이 보이고, 정상에서 비탈을 내려오면서 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적성(赤城)이다. 오늘날 적성비적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비문에 이 곳을 의미하는 적성이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오므로, 신라시대의 지명을 그대로 따왔다고 한다.

적성비가 위치한 곳은 경북 풍기에서 죽령을 넘어 충북 단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남으로는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펼쳐 있고, 남한강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다. 천혜의 요새다.

적성을 중심으로 남한강을 거슬러 북동쪽으로 온달산성이 있고, 남한강을 따라 내려가 북서쪽엔 중원 고구려비가 자리잡고 있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고구려 성이고,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알리는 비석이다.

 

단양 신라 적성비 (국보 제198호) /문화재청
단양 신라 적성비 (국보 제198호) /문화재청

 

이 자그마한 비석이 발견된 것은 우연의 일이었다.

197816,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조사단이 충북 단양을 찾았다.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해서였다. 조사단은 단양 읍내 성재산(해발 323m 적성산성)을 올랐다. 진흙밭을 지나 산성터로 이르렀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산에 오르는 길은 진흙탕이었다. 옛날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신라토기였다.

조사단이 신발에 뭍은 흙을 털려고 두리번 거리다 흙묻은 돌부리가 지표면을 뚫고 노출된 것을 발견했다. 그 돌부리에 신발 흙을 털어내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무슨 글자가 보였다. ‘()’자였고, 흙을 닦아내니 ()’, ‘()’자도 보였다. 그들은 허겁지겁 야전삽으로 흙을 걷어내고 보니, 30cm정도 비스듬히 누워있는 신라시대 비석을 발견했다.

 

단양 신라 적성비 (국보 제198호) /문화재청
단양 신라 적성비 (국보 제198호) /문화재청

 

적성비에 등장하는 인물은 신라 왕국의 실세였다. 적성비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사서에 뚜렷하게 나오는 인물이 이사부(異斯夫), 비차부(比次夫), 무력(武力)이다. 두미지(豆彌智)는 탐지(眈知), 내례부지(內禮夫智)는 노리부(弩里夫)로 보는 견해가 있고, 깨진 글씨 가운데 □□부지는 거칠부(居柒夫)가 아니겠는가 하는 관측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조(진흥왕 12, 551)에 거칠부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받은 장군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의 이름이 나온다.

비차부는 551년 거칠부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해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획득하는 장수중 하나다. 거칠부와 함께 한강 이북 공격에 나선 8장군 가운데 한사람이며, 직급은 17관등중 6등급인 아찬이다. (비문에는 아간지(阿干支)로 표현됐다.)

잡찬 탐지(耽知)파진찬 노부(奴夫)적성비의 두미지(豆彌智)와 내례부지(內禮夫智)로 추정된다. 1년 후에 탐지는 적성비두미지의 직위 파진찬보다 상위인 잡찬, 노부는 적성비의 내례부지의 관직인 대아찬의 상위등급인 파진찬으로 승진해 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적성비에 등장하는 장군중 상당수가 승진해 한반도 중원공격의 선봉대로 나섰다고 보여진다.

 

적성비에는 또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해왕의 셋째 아들 무력이 나온다.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받들어지는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할아버지다. )

김무력은 적성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신라가 한강 하류, 즉 오늘날 서울과 수도권 일대를 새 영토(新州)로 확보하고 초대 군주를 맡게 된다. 이듬해 신라가 백제와 대가야, 왜의 연합군과 관산성에서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일 때 무력은 신주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군을 괴멸시키고, 임금 성왕을 죽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비석에 나오는 대아찬 내례부(內禮夫)는 누구인가. 학계에서는 적성비의 내례부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진흥왕 순수비에서 노리부(弩里夫), 세종(世宗), 노종(奴宗), 노부(奴夫), 내부(內夫) 등 다양하게 표기된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노리부는 음을 표기한 것이고, 세종(世宗)은 이름의 뜻을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누리를 뜻하고, ‘()’은 높은 사람의 이름 뒤에 붙이는 어미격으로 ()’와 일치한다. 이사부를 태종(苔宗), 거칠부를 황종(荒宗)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노종, 내부, 내례부 모두가 음과 뜻을 혼용하면서 쓴 동일인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해석이다.

이 인물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해왕(삼국유사에선 구형왕)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에선 노종, <삼국유사>에선 세종이라고 표현했다.

진흥왕 순수비가운데 마운령비와 북한산비에 내부(內夫)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인물이 역시 노리부이며, 적성비의 내례부도 노리부라고 한다.

학계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면 노리부는 적성비에서 대아찬으로 시작해 파진찬을 거쳐 상대등까지 승진한다. 아버지 구해왕이 항복과 동시에 상등(上等)의 직위를 받은데 이어 그의 맏아들 노종도 상대등을 했고, 관산성 전투의 주역인 동생 무력의 손자 김유신이 태대각간에 올라 가야 왕족이 4대에 걸쳐 신라에서 재상을 맡게 되는 셈이다.

 

그러면 거칠부는 어디에 있는가. 적성비가 건립된 다음해, 적성 이북지역 10개군의 고구려땅을 빼앗은 주역 거칠부는 비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고고학자들 사이에 이름이 지워진 □□부지가 거칠부라는 추론이 있다.

하지만 적성비의 □□의 직위가 대아찬으로, 거칠부가 진흥왕 6(545)에 국사를 편찬한 공로로 파진찬으로 승진한 점을 감안하면 모순이 발생한다. 대아찬은 파진찬의 아래 등급으로, □□부지가 거칠부일 경우 적성비545년 이전에 설립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사부가 적성 주변에 있는 도살성과 금현성 등 2개성을 뺏은 것(550)을 계기로 소백산맥 이북의 신라거점이 형성되고, 그 무렵 적성비가 건립됐다고 보는 것이 순리적이어서 지워진 사람이 거칠부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주보돈 교수(경북대)는 확인하기 어려운 □□부지라는 인물이 거칠부로 추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적성비 건립연대를 진흥왕 11(550)으로 보았다.

거칠부는 이 곳 적성을 전초기지로 해서 다음해 고구려를 공격해 10개군을 탈취한 것은 분명하다. 적성비 건립의 시점을 기준으로 이사부와 거칠부가 야전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교대하게 된다.

 

비문에 나오는 고두림성(高頭林城)과 추문촌(鄒文村), 물사벌성(勿思伐城)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신라가 경상도 일대의 군사관할권을 상주(上州)와 하주(下州)로 나눠 각주에 군주를 파견했는데, 상주에는 두명의 군주를 둔 것으로 보인다. 주보돈 교수는 고두림성이 상주이고, 추문촌(의성군 의성읍), 물사벌성(예천군 예천읍)은 상주 관할의 지역명이고, 그 지역의 군대 수장을 당주(幢主)로 보았다.

즉 소백산 이남 지역에 배치된 신라군이 동원돼 죽령을 넘어 적성을 함락한 것이다. 구해왕의 셋째 아들 무력과 한강전투의 주역 비차부는 경상도 북부 지역의 군주로 군을 정비한 다음, 이사부의 지휘 아래 죽령을 넘어 적성 전투에 참가하고, 이후 지휘봉을 이어받은 거칠부 아래서 한강 유역과 관산성에서 백제, 고구려와 패권 싸움을 벌여 큰 전공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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