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 관우가 왜군을 물리쳤다는 미신의 소산
동묘, 관우가 왜군을 물리쳤다는 미신의 소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0.2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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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황제 요구 받아들여 지은 중국식 건물…막대한 구리 녹여 관우상 제작

 

관우(關羽)는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면 잘 아는 촉나라 장군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유비·장비와 함께 의형제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관우는 중국인에게 실제 이상으로 신격화되어 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무()와 충(), 의리와 재물의 화신으로 오늘날까지도 신으로서 숭배를 받고 있다. 그의 무용담과 충의, 의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찬사를 받았고, 그의 장례는 적국 수장인 조조, 손권에 의해 치러졌다. 그는 중국의 주류 종족인 한족을 지키는 장군으로 간주되었다. 한족국가의 후대 제왕들은 공자의 문묘와 함께 그의 무덤인 무묘에 신위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기렸다. 민간에서도 관우는 신앙의 대상이다.

우리나라에도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한족(漢族)이 아닌데 우리가 왜 관우를 모셔야 했을까. 바로 한족국가인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서울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동묘역 근처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이름하여 동관왕묘(東關王廟), 줄여서 동묘(東廟)라고 한다. 1963년 이래 국가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관왕묘 관우상 /박차영
동관왕묘 관우상 /박차영

 

필자가 동관묘를 방문했을 때 중국인 커플이 건물과 내부를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의 숭배대상을 모시는 사당이 서울 한복판에 있는 걸 보고 신기하게 생각할 것이다. 또 조선이 한때 자기네 조공국이었다는 사실에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동묘 주변은 매우 혼잡한 시장이다. 관우가 재운의 신이라 해서 시장이 형성된 것은 아닐 터이지만, 관우와 상관 없이 온갖 물건들이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동관왕묘 정문 /박차영
동관왕묘 정문 /박차영

 

동관왕묘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 32(1599)에 짓기 시작해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수 있는 구조다. 규모는 앞면 5·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지붕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새의 부리처럼 뻗어 나오는 익공계 양식이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당 내부에 설치된 금동관우좌상은 구리 4,000여 근(2.4)을 녹여 만든 높이 2.5m 짜리 황금색 금동신상이다. 1601년에 제작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장수 10명이 풍로 10개에 구리 3,800근을 녹이려다가 실패하고, 조선의 관리 한빈(韓斌)이 구리장인을 모아 300근을 더 넣고 녹여서 제조했다고 한다. 한중합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인 셈이다.

 

동관왕묘 정전 /박차영
동관왕묘 정전 /박차영

 

동묘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을 지원했던 명나라 장수들의 요구가 있었고, 명 황제 신종(神宗)이 이런 의견을 수용해 조선에 요청했고, 선조가 이를 따라 건립되었다. 중국에선 공자의 문묘처럼 무묘를 세워 관우를 숭배해 왔다. 임진왜란에 왜군을 물리친 것은 관우의 조력이 있었다기 때문이라는 미신과 같은 신념이 작용했다.

신종의 칙사 만세덕(萬世德)이 황제의 요청을 선조에 전하니,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칙령을 받든 것이다. 신종은 관왕묘 건립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기금으로 4,000금을 보내왔다. 명의 만세덕은 숭례문 밖에 관왕묘를 세우자고 했으나, 남관묘가 이미 있었으므로, 선조는 동대문 밖에 땅을 내주어 동묘를 짓게 했다.

전란이 끝난 다음해인 선조 32(1599) 공사를 시작해 선조 34(1601) 동관왕묘가 완공되었다. 신종이 친필 현판을 보내왔다. 동관묘 축조에는 매달 200명의 군인이 부역했다.

 

동관왕묘 내삼문 /박차영
동관왕묘 내삼문 /박차영

 

조선시대에는 한양에 네 곳의 관우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동관묘, 남대문 밖에 남관묘, 명륜동에 북관묘, 서대문 밖에 서관묘가 있었다. 이중 동관묘만 그대로 남아있고 남관묘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1967년에 다시 재건되었다가 지금은 사당동으로 옮겨졌다. 다른 두 곳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서울에는 동묘와 남묘 외에 명륜동의 관성묘, 방산동의 성제묘, 예장동(남산)의 와룡묘, 장충동의 관성묘 등의 관왕묘가 남아 있다.

 

동관왕묘 향로석 /박차영
동관왕묘 향로석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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