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①…정복군주, 신라영토 세배 확장
진흥왕①…정복군주, 신라영토 세배 확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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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 예국, 실직, 맥국, 대가야 등 영토화…순수(巡狩) 세리머니

 

신라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은 신라의 영토를 세 배나 확대한 위대한 정복왕이었다. 그가 정복한 땅의 옛주인은 함경남도 지역의 동옥저, 강원도 영동지방의 예국, 실직, 영서지방의 맥국, 경상남도 대가야 등이다. 그에 앞서 신라는 지증왕 시절에 우산국, 법흥왕 시절에 금관가야, 안라가야등을 신라 영토로 편입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정립(鼎立)해 반도의 주인을 놓고 대결을 벌이기 앞서 세 나라 국경 사이에서 버티며 부족국가를 유지하던 소국들은 거의 모두 신라로 편입됐고, 완충지대의 소국이 흡수되면서 삼국은 국경을 맞대고 밀고 당기는 영토전쟁을 벌이게 됐다.

 

진흥왕은 새로 영토로 편입한 변경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의 행정과 민정을 시찰하는 순수(巡狩) 세리머니를 즐겼다.

 

북한산 순수비의 비봉 원위치 /문화재청
북한산 순수비의 비봉 원위치 /문화재청

 

<삼국사기>에 진흥왕의 순수 기록이 나온다.

 

진흥왕 12(551) 3,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 청주)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진흥왕 16(555) 10, 임금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하고, 영토의 국경을 정했다. 11, 임금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거쳐 지나온 주군(州郡)의 일 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그 지방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 사형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진흥왕이 즉위 12년째 청주 지방을 순시한 것은 한해 전에 이사부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아 신라의 새로운 영토가 됐음을 선언하기 위한 행사였다. 555년에 이뤄진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삼고, 다음해인 554년에 신주의 군사력을 동원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을 대파한 것을 기념한 행사였다.

진흥왕의 순수 활동은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고 친정체제 수립을 천명한 이후부터 시작됐다.

<삼국사기>는 진흥왕의 순수에 대해 두 번의 기록을 남겼지만, 마운령, 황초령, 창녕비등이 나중에 발견됨으로써 진흥왕이 함경남도와 경상남도 지역에도 순수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진흥왕은 새로운 확보한 영토를 방문해 주민을 위무하고 행정 체계를 둘러보는 정치적 이벤트를 수시로 했음을 알수 있다.

 

창녕 신라 척경비 /문화재청
창녕 신라 척경비 /문화재청

 

진흥왕 순수비 건립시기는 마운령, 황초령, 북한산비는 568(진흥왕 29), 창녕비는 그에 앞서 7년전인 561(진흥왕 22)으로 추정된다. 창녕비는 신사(辛巳)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 555년에 비사벌(比斯伐,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했다는 기록을 감안해 561년의 건립연대를 찾아냈다.

순수라는 정치이벤트를 열고, 국경에 여러개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고도의 정치 행위다. 그러면 진흥왕이 이처럼 고도의 정치쇼를 벌인 것은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진흥왕이 친정체제를 수립한 이후 한 행위를 살펴보면 그의 의도를 이해하기 쉽다.

 

진흥왕 시절 신라의 영토확장 /그래픽=김현민
진흥왕 시절 신라의 영토확장 /그래픽=김현민

 

12,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개칭. 낭성(청주) 지역에 순행

13, 우륵의 음악을 배우게 함.

14, 월성 동쪽 궁궐예정지에 황룡사를 짓도록 함.

16, 북한산 순행.

27년 기원사, 실제사 완공. 황룡사 준공.

29년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개칭.

33년 연호를 홍제(鴻濟)로 개칭. 팔관연회 개최.

36, 황룡사 장륙상(불상) 주조.

37, 원화(源花, 화랑의 전신) 제도 도입 .

 

진흥왕은 재위시 세 번이나 연호를 바꾼다. ‘나라를 연다’(開國)라는 뜻으로 친정체제 수립을 선언한 이후, 국토가 세배 가까이 늘어난 시점에선 크게 번창한다’(太昌)라는 구호를, 말년엔 널리 구제한다(鴻濟)’는 부처님과 같은 마음으로 베품과 아량을 과시했다.

진흥왕은 영토의 확대에 힘입어 왕자로서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적국 출신인 우륵에게 관용을 베풀어 포용하면서 그의 음악을 확산시키고, 궁궐을 지으려다가 용이 나왔다고 그 터에 절을 짓게 하며, 팔관회를 열고, 청년층을 조직하며(원화제도).... 이런 기록들은 진흥왕이 대국의 왕이 됐음을 내외에 과시하는 행위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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