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잃어도 왕족 무덤은 화려하게 꾸몄다
나라를 잃어도 왕족 무덤은 화려하게 꾸몄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0.29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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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영휘원, 돌도 안돼 죽은 원손의 무덤 숭인원

 

조선 26대 국왕 고종의 정비는 명성왕후다. 명성왕후는 TV드라마, 뮤지컬, 영화로 많이 나와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명성왕후가 1995년 을미사변으로 살해된 이후 고종을 끝까지 지키고 보필한 여인은 엄귀비다. 나중에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로 추증되었다.

엄귀비는 명성왕후가 살해된 이후 실질적 퍼스트 레이디로서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근대교육기관인 양정을 비롯해 숙명, 진명학교를 세웠다. 그녀는 영친왕의 생모이기도 하다.

 

순헌황귀비 엄씨 묘 영휘원 /박차영
순헌황귀비 엄씨 묘 영휘원 /박차영

 

순헌황귀비 엄씨는 서울동대문구 홍릉길에 있는 영휘원(永徽園)에 묻혀 있다. 원래 이곳은 명성왕후의 능묘인 옛 홍릉(洪陵)이 있던 곳이다. 1911년에 황귀비 엄씨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 경내인 현재의 자리에 무덤을 조성했다. 일정기간 정실왕비와 후궁이 함께 묻혀 있었다.

19191월 고종이 승하하고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자리(홍릉)를 정했다. 청량리 구홍릉에 있던 명성황후의 무덤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 옆에 합장하고 옛 홍릉에는 황귀비의 무덤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황귀비의 아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아들 이진이 1922년에 사망하자 황귀비의 옆에 묻었으니, 지금의 숭인원(崇仁園)이다. 친할머니와 원손이 함께 묻혀 있는 것이다.

 

영휘원 재실 /박차영
영휘원 재실 /박차영

 

영휘원 입구에는 재실이 있고,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안에는 원표석 1기가 있는데 순헌귀비 영휘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 뒤에는 어정(우물)이 남아 있다. 원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만을 둘렀으며,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을 배치했다. 석양과 석호는 각 1쌍씩 배치했고 무석인은 생략했다.

 

영휘원 비각 /박차영
영휘원 비각 /박차영

 

엄귀비는 평민으로 서소문 근처에 살던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종로 육전거리에서 장사를 했다고도 한다. 집안이 빈한해 8살에 궁궐에 나인으로 들어갔다. 나인(內人)이란 임금이나 왕비의 시중을 드는 몸종과 같은 여인으로, 평생 수절해야 하는 불운한 여인이었다. 어려서 총명했다고는 하나, 신분이 신분인지라 말 없이 높으신 분을 모실뿐이었다.

그러던 그녀는 1885년에 고종의 승은(承恩)을 받았다. 명성왕후의 시위상궁이었던 그녀는 임금의 하룻밤 사랑보다는 중전의 불호령이 걱정이었다.

불 같은 성격의 명성왕후는 엄 상궁을 형틀에 매달아 무섭게 고문하려 했다. 중전은 엄상궁을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그런데 마음이 여린 고종이 중전에게 사정사정했다. 명성왕후는 남편의 청을 이기지 못해 엄 상궁을 살려주기는 했지만 서인으로 떨어드리려 했다. 이때 대신 윤용선이 임금에게 아뢰어, 서인은 면했다. 그때 엄 상궁의 나이는 31.

그후 엄 상궁의 궁궐 밖 10년 세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녀가 다시 고종의 부름으로 궁궐에 들어오게 된 것은 명성황후 사후 5일째 되던 날이었다. 중전을 잃은 고종은 옛 사랑을 찾은 것이다.

 

어정(우물) /박차영
어정(우물) /박차영

 

명성왕후가 죽고 생긴 빈자리는 엄 귀비가 채웠다. 1995년 궁궐에 다시 들어간 엄 상궁은 고종을 아관(俄館), 즉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는 주역으로 등장했다. 재입궁 3개월째인 18962월 엄 상궁은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과 공모해 경복궁에서 고종과 왕세자(후에 순종)의 탈출을 실행했다.

엄 귀비는 거사 전 며칠 전부터 가마를 타고 궁궐출입을 자주했다고 한다. 궁궐지기들에게는 나갈 때마다 몇꾸러미의 행하((行下, 용돈)를 주었다. 무료하게 궁궐을 지키던 군인들은 처음에 경계를 하다가 돈맛에 빠져들어 엄 상궁의 궁궐 출입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을 두지 않았다.

1896211일 새벽 가마 두 개가 경복궁 건천문을 빠져 나왔다. 앞의 가마에는 엄 상궁이 바짝 출입문에 앉았고 뒤에는 고종이 몸을 숨겼다. 뒤 가마에는 다른 궁녀가 가마문 앞에 버티고 앉았고 순종이 바짝 뒤에 숨어있었다. 건춘문을 통과한 두 개의 가마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미국 공사관을 지나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엄상궁의 지모와 배짱이 아관파천을 성공시킨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생활할 때 엄 상궁은 영친왕을 갖게 되었다. 1년후인 1897220일 환궁을 하게 되는데,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가게 된다. 환궁후 엄 상궁은 영친왕을 낳아 귀인으로 봉해지고 이어 귀비로 책봉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고 고종은 아들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순종은 병약했고, 아들이 없었다. 가뜩이나 나라가 어려웠기에 황태자를 세워야 했다. 황귀비 엄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 은()을 황태자로 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이은의 배다른 형인 의친왕이 대원군 종손인 이준용과 손잡고 반발했다. 의친왕은 서열로는 자신이 황태자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준용도 역모를 품고 있었다.

고종의 선택은 황귀비가 낳은 이은이었다. 이은을 결정하는데 당시의 실력자 이완용의 힘이 있었다고 한다. 황태자 이은이 영친왕(英親王)이다.

황귀비는 양정의숙(현재의 양정고), 진명여학교(진명여고), 명신여학교(숙명여대)를 세웠다. 황귀비 엄씨는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다가 72057세의 나이로 한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사후에 시호를 순헌(純獻) 궁호를 덕안궁(德安宮)이라 했다.

 

고종의 손자 이진의 무덤 숭인원 /박차영
고종의 손자 이진의 무덤 숭인원 /박차영

 

황귀비의 아들 영친왕은 1920년 일본 황족인 마사코(李方子)와 결혼해 1921818(양력) 일본에서 아들 진()을 낳았다. 이진은 아버지 영친왕이 아내와 함께 일시 귀국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인 192511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급사했다. 배앓이로 죽었다는 공식발표와 함께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는 독살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순종황제는 원손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을 내렸다.

그 원손의 무덤이 숭인원이다. 홍살문, 향로, 판위, 정자각, 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원표석 1기가 있는데 원손 숭인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원침의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호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석물과 봉분의 크기를 다른 원급보다 작게 조성했다고 하지만,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의 무덤 치고는 지나치게 호사스럽다. 나라를 잃은지 10년이 넘고, 3·1 만세운동이 일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는데, 구 왕족들은 자기들 씨족에 관리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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