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국 오백년 도읍지 슈리성
류큐 왕국 오백년 도읍지 슈리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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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파괴…곳곳에 복원 흔적

 

오키나와(沖繩)섬을 방문한 것은 201611월초였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아열대 기후를 느낄수 있는 곳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류큐 열도는 마치 하와이처럼 느껴졌다.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거센 파도가 섬 주변의 산호초에 부딛쳐 흰 포말을 만들어 냈다.

한국에서는 두터운 외투를 입어야 할 날씨였는데, 나하(那覇) 공항에 내려보니 초여름의 후끈한 기운이 몰려왔다. 모노레일역을 찾아가는데, 반팔 차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땀이 났다.

오키나와현 모든 섬의 평균 연평균 기온이 21.5~23.8도 사이이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 기온이 16도로 겨울에도 눈을 구경하기 어렵고 얼음이 얼지 않는다. 해양성 기후이므로, 가장 더운 7월의 평균 기온은 27.7~29.1도인데, 여름한철 낮 최고기온은 30도를 넘는다.

 

류큐왕국 슈리성 정전 / 사진=김현민
류큐왕국 슈리성 정전 / 사진=김현민

 

숙소에 짐을 풀고 우선 슈리성(首里城)을 찾았다. 오키나와가 450년간 독립왕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장소다. 모노레일 역에서 내려 5분여 걸으면 슈리성 공원이 나타난다.

얕은 구릉에 세워진 성이다. 오키나와에서는 성을 구수쿠(ぐすく)라고 부른다. 성벽에서 내려다 보면 나하(那覇)항이 보인다.

슈리성은 오키나와를 지배한 류큐국(琉球國)의 왕성이다. 오키나와를 통일한 쇼하시(尙巴志)왕이 류큐왕국을 세운 이래 나하의 슈리성에는 역대 국왕이 머물며 통치해왔다. 류큐국 왕은 통일 초대왕인 쇼하시에서 일본에 의해 나라를 잃은 쇼타이(尚泰)에 이르기까지 25대에 이른다.

조선왕조가 1392년 건국해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까지 27대에 이른 것과 대략 비슷하다. 류쿠왕국의 존속기간이 1429~1879년이었다. 조선왕조가 1392~1910년 기간이었으므로, 류큐국은 조선왕조보다 37년 후에 시작해 31년전에 나라를 잃었다. 조선왕조 기간 518년 내에 류큐국이 450년간 존재했던 것이다.

 

슈리성 제일 관문 간카이몬(歓會門). /사진=김현민
슈리성 제일 관문 간카이몬(歓會門). /사진=김현민

 

류큐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겐 슈리성을 보전할 생각이 없었다.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슈리성 아래에 지하 참호를 파서 총사령부를 두었다. 1945525일부터 사흘에 걸쳐 미군 미시시피 함 등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슈리성은 완전하게 소실되었다. 또 미군이 오키나와를 상륙하는 과정에 격렬한 전투로 슈리성 아래의 마을을 비롯해 류큐국의 보물과 행정 문서를 포함해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다.

패전 뒤 미 군정기에는 슈리성 터에 류큐 대학이 세워지면서 왕궁과 성벽이 헐리고, 많은 유물들이 뭍혀 버렸다.

나라를 잃으면 왕성과 궁궐도 남아 있기 어려운 게 역사의 현실이다. 그러다가 1980년 류큐 대학을 이전하고 1992년 세이덴(正殿) 등 옛 유적을 복원하면서 오늘날 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일본 정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했지만, 복원한 문화재는 등재를 받아주지 않는다. 가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슈리성 터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고, 복원한 건물과 성벽은 등록되지 못했다. 역사를 파괴한 대가다.

 

니치에이다이(日影台)라는 해시계. 일본 표준시보다 30분 늦다. /사진=김현민
니치에이다이(日影台)라는 해시계. 일본 표준시보다 30분 늦다. /사진=김현민

 

슈리성은 한양도성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다. 또한 일본 본토의 오사카(大阪), 구마모토(熊本)성처럼 성주 개인의 성채와는 다르다. 일본 성의 특징인 해자와 높은 담벼락, 고층빌딩을 연상케 하는 건축물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다. 어쩌면 조선의 도성과 궁궐을 연상케 한다. 도성이 둘러싸고, 그 안에 왕궁이 있는 방식이다.

성의 건물은 대체로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중국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문이나 각종 건축물은 옻나무로 주홍칠이 되어 있다. 기와 지붕에는 초기는 고려기와, 후에 적와가 쓰여졌고, 장식으로는 국왕의 상징인 용이 많이 쓰였다.

지형을 잘 이용한 것도 한국 궁궐과 비슷하다. 창덕궁에서 경사진 면을 그대로 살려 건축물을 세운 방식이 슈리성에서도 보여 진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살려 인공을 가미하는 방식은 오히려 일본의 성채라기보다 조선의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세이덴 앞에 걸려 있는 종. “무역을 통해 만국의 가교로서 번성하고자 한다”(萬国津梁の鐘). 는 명문이 새겨 있다. /사진=김현민
세이덴 앞에 걸려 있는 종. “무역을 통해 만국의 가교로서 번성하고자 한다”(萬国津梁の鐘). 는 명문이 새겨 있다. /사진=김현민

 

슈리성의 창건시대는 명확하지 않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흔적이 14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되어, 통일왕국 이전의 삼산(三山) 시대에는 중산(中山)의 성으로서 쓰였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1427년 성의 정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창건 시기는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오키나와 일대에 많은 성(구스쿠)이 지어졌던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사이에 슈리 성도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이 완성된 것은 1477~1555년 경으로 추정된다. 삼국을 통일하고 류큐 왕조를 연 쇼하시왕이 슈리성을 류큐 왕국의 수도성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옛 성벽은 일부가 남겨져 있고, 새로운 성벽의 건설을 할 때 땅속에서 원래의 석재를 발굴해 사용했기 때문에 지표 가까이에 옛 성벽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이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원래의 슈리성의 유구다.

슈리성은 정치및 군사의 거점이익도 하지만, 성역이기도 하다. 원래는 성내에 신을 모시는 열곳의 우타키(御嶽)가 있었다고 하지만, 많은 곳이 사라졌고, 일부만 복원되어 관광용으로 전시되고 있다.

 

신을 모시는 우타키(御嶽) /김현민
신을 모시는 우타키(御嶽) /김현민

 

슈리성은 내곽과 외곽으로 나뉘어 진다.

외곽에 있는 성문 눈에 띄는 것은 성의 제일 관문인 간카이몬(歓会門)이다. 이 곳은 명나라의 사신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 조선조가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해 서대문 인근에 영은문(迎恩門)을 세운 것을 연상케 한다. 류큐국이 중국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는 관계였음을 성문 이름이 알려줬다. 류큐는 명-청나라와는 상국-조공국 관계였지만, 일본 막부(幕府)와는 종속관계를 맺지 않았다.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중국의 세력권에 의지해 왕권을 지탱했던 나라였다.

이 문을 통해 성곽에 들어가면 로코쿠몬(漏刻門)'이라는 물시계 문을 만나게 된다. 문 위에 물시계를 설치해 시각을 재고 북을 치면 동쪽과 서쪽에 있는 망루에서 이를 듣고 종을 쳐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로코쿠몬 정면에 물시계를 보완하기 위해 설치한 니치에이다이(日影台)라는 해시계가 있다. 해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현재 일본 표준시(한국시간과도 동일)보다 30분 늦다.

국왕이 거처하고 국정을 의논했던 곳이 세이덴(正殿)이다. 주변엔 관료들이 업무를 보던 호쿠덴(北殿), 남쪽의 정전인 난덴(南殿)과 보초소인 반쇼(番所) 등이 자리잡고 있다.

세이덴은 류큐 왕국의 최대 목조 건축물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류큐국의 독자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1층과 2층에 국왕의 옥좌가 있다. 옥좌 뒤로 국왕이 사용한 계단이 미닫이 문 안에 있는 독특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세이덴 앞에 걸려 있는 종(万国津梁)에는 무역을 통해 만국의 가교로서 번성하고자 한다는 명문(銘文)이 새겨 있어 류큐국이 해양 왕국임을 보여준다. 이곳의 종은 모조품이며 진품은 오키나와 현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왕이 거주하는 세이덴(正殿)은 또다른 이름으로 카라후(唐破風)라고도 불린다. 안에는 1층과 2층의 양쪽에 우사스카(御差床)라는 옥좌가 만들어져 있다. 2층의 우사스카 위에는 청나라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현판이 장식되어 있었으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모두 소실되고, 강희제(康熙帝)가 내린 중산세토(中山世土)라는 편액만이 복원되어 걸려 있다.

 

복원한 류큐국왕 옥좌, 청 강희제가 내린 중산세토(中山世土)라는 편액도 복원되어 있다. /김현민
복원한 류큐국왕 옥좌, 청 강희제가 내린 중산세토(中山世土)라는 편액도 복원되어 있다. /김현민

 

정전 앞에는 신료들이 알현하거나 중국에서의 책봉 사절을 맞아들이기 위한 우나가 만들어져 있다. 국왕이 정부를 보던 북쪽 궁전, 의례 등에 쓰였던 남쪽 궁궐, 입구인 봉신문(奉神門)이 있다.

국왕이 거쳐하던 정전(세이덴)에 옥좌와 왕관이 전시되어 옛 류큐국의 영광을 재현하려 나름 애썼지만, 모두 복원된 것들이라는 점에서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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