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영릉을 옮기며 석물은 왜 다시 만들었나
세종영릉을 옮기며 석물은 왜 다시 만들었나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0.30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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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워서 이동 안하고 매장…후에 발굴해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잇는 세종대왕기념관은 197011월에 준공하고 197310월 개관했으니, 벌써 50년된 건물이다. 대지 13,200, 연건축면적 2,475에 소장 유물은 627점이나 된다. 세종임금에 관한 유물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세종대왕박물관이라고도 한다. 관리와 운영주체는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다.

 

세종영릉 신도비 /문화재청
세종영릉 신도비 /문화재청

 

기념관 입구에서 만나는 것이 세종영릉 신도비(英陵神道碑). 조선 4대 임금으로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되는 세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문종이 1452(문종 2)에 세운 것이다. 비에는 세종의 일대기가 적혀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했던 문신 정인지(鄭麟趾)가 글을 짓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로 당대의 대표적 서예가였던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글씨를 썼다. 비신의 표면이 심하게 부식되어 금석문의 내용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겸성균관대사성 신 정인(兼成均館大司成臣鄭麟)···”“···신 용 봉교서(臣瑢奉敎書)···”와 같은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다.

또한 비신과 한 몸으로 제작된 이수(螭首)는 원형을 거의 간직하고 있다. 이수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마주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으로, 매우 정교하고 생동감이 넘치게 조각되었다.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은 서초구 내곡동의 헌릉 서쪽에 소헌왕후와 합장했으나,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예종 원년(1469)에 지금믜 여주로 옮겼다. 이때 원래의 영릉 터에 있던 신도비와 상석, 장명등, 문인석, 무석인, 석수 등은 옮기기에 무거워 그 자리에 묻었다. 그런데 1691(숙종 17)1738(영조 14)에 영릉 신도비가 노출되었는데, 논의 끝에 다시 묻었다.

1974년에 옛 영릉 터를 발굴해 비신과 이수를 발견했으나, 비석의 받침돌은 찾지 못했다. 이에 1999년 받침돌을 새로 제작해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다시 제작했고, 2004년에 비각을 건립했다. 보물 1805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 영릉 석물 /박차영
구 영릉 석물 /박차영

 

신도비에서 올라가면 야외에 석조 조각들이 진열되어 있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번지 일대에 자리잡았던 세종대왕의 옛 영릉에서 나온 석물들이다. 구 영릉 석물(舊英陵 石物)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구 영릉은 국조오례의의 치장제도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능이자 조선 초기 왕릉을 대표하는 능이었다. 구 영릉은 동분이실(同墳異室)의 석실을 채택했고, 문관석인상과 무관석인상을 각각 2, 석양·석마·석호를 각각 4기씩 제작했다. 석실 내부에는 고구려 계통의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 일월성신도를 그렸으며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돈 병풍석으로 둘렀고, 그 바깥쪽으로 다시 외박석(外薄石)과 난간주석을 설치했다. 아울러 구 영릉에는 세조의 릉인 광릉 이후에서는 보이지 않는 신도비도 세워졌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장대한 왕릉제도는 구 영릉 이후 최초로 조성된 문종의 릉인 현릉과 세조의 릉인 광릉부터는 적용되지 않게 된다. 또한 같은 세종의 릉이라도 현재의 영릉은 예종 때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구 영릉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구 영릉 석물들은 구 영릉 조성과 시기를 같이 하여 세워진 것으로 영릉이 여주로 천장될 때 운반상의 어려움 때문에 땅에 묻었다. 19731974년 발굴당시의 품목과 수량이 다 남아 있지는 않았다. 각각 4기씩 조성되었을 석양상과 석마상은 현재 각기 2기씩 남아 있고, 2기였던 망주석은 현재 1기 중 일부만이 남아 있다. 장명등과 석인상은 다 갖추어져 있으나 장명등의 경우 개석이 망실되어 있다. 세종대왕신도비는 이수와 비신만 남고 귀부가 망실된 채 발굴되었다. 혼유석은 동측 부분이 절단된 상태이고 원래 4기였을 고석(鼓石)1기만 남아 있다. 병풍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주시경비 /박차영
주시경비 /박차영

 

야외에 주시경 선생 묘비가 있다. 주시경 선생은 187611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태어나 19살인 1894년에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닦고 이로부터 20년 동안 우리 말글 연구와 교육 및 한글 운동을 하다가 39세 되던 해인 1914727일 작고했다. 선생의 유해는 서대문 밖 수색 고택골(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했다.

한글 학회가 1959107고 주시경선생 이장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1960101일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묘소에서 각계 인사들과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시경 스승 이장식묘비제막식을 거행했다. 묘비는 최현배가 짓고 글씨는 정인승이 썼다.

선생의 묘소는 그 뒤 19811212일 국립묘지(서울시 동작구)로 다시 옮겨 모셨으나, 묘비를 비롯한 석물은 옮기지 않고 그 옛 무덤 터에 그대로 세워두었다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한글 학회가 2008731일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

 

수표 /박차영
수표 /박차영

 

기념관 야외에 전시된 문화재로는 보물 제838호인 수표(水標)가 있다.

수표는 세종 때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를 만들고, 같은 방법으로 하천의 수위를 측정기 위해 설치한 측량기기다. 한강변과 청계천 2곳에 설치했는데 한강변의 것은 바윗돌에 직접 눈금을 새긴 것이고, 청계천의 것은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그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청계천의 수표는 성종(재위 14691494) 때 돌기둥으로 개량한 것으로 높이 3m, 20의 화강암 사각기둥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올려져 있고, 밑에는 직육면체의 초석이 땅 속 깊이 박혀있다. 돌기둥 양면에는 1(21)마다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기고 3·6·9척에는 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라고 표시했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수위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보아 하천의 범람을 미리 예고했다.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현재에 이른다. 다리 옆에 서 있던 수표는 다리를 옮길 때 함께 장충당공원으로 옮겼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세종대왕 동상 /박차영
세종대왕 동상 /박차영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 익숙한 세종대왕 동상을 볼수 있다. 이 동상은 대왕의 위업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학계, 문화예술계, 교육계, 정계, 실업계 등 명사들로 구성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의 자문을 받고 19653월부터 추진해 196854일 덕수궁 중화전 동쪽 광장에 모셨던 것이다. 이 동상은 단기 4345(서기 2012) 세종대왕 탄신 615돌을 맞아 이곳으로 옮겼다. 김경승 작가의 작품이다.

 

야외에 세종대왕 재위시 제작된 과학기술제품의 모형도가 설치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앙부일구(해시계)

오목 해시계는 세종 16(1434)에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처음으로 대중시계로 썼다. 이 해시계는 오석에 반지름 30의 반구를 파고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을 꽂아 그 끝이 구의 중심에 오게 만든 것이다. 그 바늘 끝의 그림자의 위치는 진태양시와 계절을 가리키는데 우리가 쓰는 시간은 (동경 135°선 기준의 평균 태양시이므로 해시계보다) 31.8+균시차만큼 빠르다. 그러므로 이 해시계의 눈금을 읽고 뒷면의 그래프에 나타난 시간을 더하면 우리나라의 상용시가 된다.

 

해시계 /박차영
해시계 /박차영

 

자격루(물시계)

물시계는 아래물통에 물이 드는 대로 자가 떠올라서 자의 눈금을 가지고 시간을 알도록 한 것이다. 물시계의 역사는 이미 신라 성덕왕 때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 20(1438)에는 더 정밀한 자격루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 물시계는 중종 31(1536)에 주조된 것으로 현재 덕수궁에 보전되어 있는 것을 1/2로 줄여서 만든 것이다.

 

물시계 /박차영
물시계 /박차영

 

측우기

측우기는 비가 온 양을 재는 기구로서 세종 23(1441)에 당시 세자인 문종에 의해 창안되어 세종 24(1442)까지 과학기술자들이 제작한 세계 최초의 우량계이다. 쇠를 부어 만들었으며, 서울은 서운관에 설치했다. 각 도에는 쇠로 주조한 측우기와 주척을 견본으로 보내어 각 고을은 이 체제에 따라 자기나와기로 만들어 설치하도록 했다. 길이는 31.215cm이고, 지름은 14.567cm. 현재 우리나라에는 헌종 3(1837)에 제작한 측우기(보물 제561) 1기와 측우대 5기가 남아 있다. 이 전시물은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는 헌종 때의 측우기와 관상감측우대(세종대로 추정. 보물 제843) 를 복원한 것이다.

 

측우기 /박차영
측우기 /박차영

 

세종문화진열실은 총면적 716으로 세종대왕 일대기실,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등 4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세종대왕 일대기실에는 화가 김학수가 재위 32년간의 업적을 담아 그린 14폭의 그림이 있고, 한글실에는 세종 당시와 이후의 보물급 한글 관계 문헌 100여 종을 비롯,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참고문헌과 외국문자의 탁본, 한글기계화 관련자료가 진열되어 있다. 과학실에는 세종 때의 조판·인쇄 과정을 재현한 활자 유물을 비롯해 보물급의 천문·기상 기구와 도량형·지도·약재 등이 진열되어 있다. 또 국악실에는 세종 때 정비된 각종 국악기 70여 점과 악보·악서, 악사 복식, 무용 복식 등이 진열되어 있다.

 

박물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박물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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