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수토사의 뱃길③…금령의 섬, 미지의 섬
울릉도 수토사의 뱃길③…금령의 섬, 미지의 섬
  • 이효웅 해양전문가
  • 승인 2022.10.31 06: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요도·삼봉도 소문…경상도 어민에게 우청도로 알려진 독도

 

(에서 계속)

4. 조선 어민들의 울릉도·독도 항해와 항로

 

함경도 어민들이 울릉도를 가려면 북쪽에서 연안을 타고 오다가 강원도에서 남동쪽으로 항해를 한다. 그러므로 함경도나 강원도에서는 울릉도가 먼저 보이므로 독도를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남쪽의 어민들은 마음만 먹으면 독도를 볼 수도 있고 갈 수도 있다. 남쪽에서 북동쪽으로 항해를 하다가 울릉도가 보이면 울릉도를 좌측에 두고 동쪽으로 항해하면 독도를 찾을 수 있다.

북쪽의 어민들은 가을철 북서풍이나 서풍을 타고 동남쪽으로 항해하였고, 반대로 귀항할 때는 남동풍이나 동풍을 타고 서쪽으로 항해하였다. 경상도, 전라도 어민들은 봄·여름철의 남서풍을 타고 북동쪽으로 항해하고, 울릉도에서 동풍이나 북동풍을 타고 서쪽이나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강원도 어민들은 삼척포와 월송포에 강원도 수군 진영이 있고 감시가 심하여 금령의 섬인 울릉도·독도에는 가기 어려웠다.

 

1) 함경도 어민들의 항해와 항로

 

조선 초에는 바닷가의 어민들은 세금과 군역 등을 피하기 위하여 가족을 데리고 이상향인 동쪽바다의 울릉도로 숨어들었다. 당시 울릉도는 섬에서 민중을 해방시킬 정진인(鄭眞人)이 출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해도출병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울릉도는 동해의 이상향으로 희구되어(주1) 많은 사람들이 울릉도로 숨어들었다.

1473(성종 4)에 영안도 관찰사 정란종(鄭蘭宗)에게 내린 유서(諭書)에서 무릉도는 잘 아는 섬이고 요도(蓼島)는 모르는 섬인데 세상에 전하기를 무릉도 북쪽에 요도가 있다지만 다녀 온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의심스럽다 하였다.(주2) 당시 요도는 울릉도 북쪽의 미지의 섬으로 알고 있었고 영안도를 중심으로 요도를 찾기 시작하여 멀리 보이는 섬은 요도라고 추정하여 보고 하였다. 그러던 중, 양양 앞 바다에 요도가 있다고 소문이 났다.

1476(성종 7)에 섬으로 도망간 사람들을 불러들이려고 삼봉도에 갔다 온 사람들을 찾아서 탐사대를 만들어 요도 찾기에 나섰다. 함경도 관찰사는 김자주와 송영로와 전에 갔다 온 김흥, 김한경, 이오을망 등 12인에게 마상선(麻尙船) 5척을 주어 요도를 찾게 하였다.

 

[자료8] 김자주의 항해

김자주는 지난 916일에 경성(鏡城) 땅 옹구미(甕仇未)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해 같은 날 부령(富寧) 땅 청암(靑巖)에 도착하여 자고, 17일에 회령(會寧) 땅 가린곶(加隣串)에 도착하여 잤으며, 18일에는 경원(慶源) 땅 말응대(末應大)에 도착하여 잤고, 25일에 섬 서쪽 7, 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려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합니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습니다. (주3)

 

김자주와 김한경의 함경도 항로를 살펴보면, 경성(옹구미:청진시)-부령(청암:청진항)-회령(가린곶:가린단)-경원(말응대:말응대진)이다. 마지막 출항지가 경원의 말응대는 북쪽에서 가장 좋은 항구인 오늘날의 라진항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서 울릉도 성인봉까지는 약528km(285.2해리, 174.5°), 독도까지는 약570km(308해리, 166°)이다. 당시의 항해 방법을 추측해 보면, 경성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간 것은 동해상의 이정표인 울릉도(성인봉 986m)를 향하여 태양과 북극성을 이용한 정남항해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가을철 북서풍이 부는 맑은 날 평속 약 4노트(7.4km)x24시간x3=532.8km를 항해할 수 있다. 김자주 일행은 919일 경원에서 도착하여 말응대에서 항해 준비와 바람을 기다렸다가 922일 출항하여 43(주4)를 항해하여 925일에 울릉도에 도착하였다.

 

 

(그림3) 통천 난도(약 15km) /이효웅
(그림3) 통천 난도(약 15km) /이효웅
(그림 4) 요도탐사대 울릉도항로 /이효웅
(그림 4) 요도탐사대 울릉도항로 /이효웅

 

울릉도 북동쪽의 세 바위(삼선암) 3km 북서쪽에 도착하여 바라보니, 작은 섬(관음도)를 지나 암석이 벌려 섰으며(와달리 절벽), 다음은 복판 섬(죽도), 복판 섬 서쪽에 작은 섬(북저바위)은 바닷물이 통하고, 섬을 살피던 중 와달리 절벽 아래 갯바위에 있는 인형(가재 또는 강치)(주5) 30마리를 발견하였다. 지친 항해로 섬 가까이 오니 이상한 사람들이 보이므로 겁이 나서 상륙도 못하고 섬 모양을 그려가지고 왔다. 김자주와 김한경 일행이 인형을 구별하지 못하였던 것은 그 만큼 항해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회백색의 독도 강치를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 역광 상태이므로 가재들의 모습이 반짝반짝 빛나서 흰옷을 입은 사람처럼 보여 잘 구분 할 수 없었다고 본다. (주6)

 

2) 요도·삼봉도의 실체

 

박세당의 서계잡록(西溪雜錄)(주7)울릉도에는 요도에 관한 이야기는 없지만, 삼봉도에 관한 이야기는 몇 차례 나온다. 울릉도-신라사에 울릉은 무릉또는 우릉이라고 한다.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우뚝 송아 허공을 떠받치고 있는데...,중략, 모래톱의 수목(水木)까지도 또렷이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육지에서 본 모습이다. 그리고 고려 의종 때 명주도 감창(溟洲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은 울릉도에 가서 산마루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삼봉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조선 성종 2년에 따로 삼봉도가 있다.”고 하는 자가 있어 박원종을 파견하여 찾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풍랑이 심하여 정박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조선 선조 때 한 승려는 임진년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병오년에 왜인(倭人)들과 울릉도에 갔었는데 섬에 큰 산이 있고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고 하였으나 직접 산에 오르지는 않았다.(주8) 그리고 조선 초 김한경 일행은 삼봉도에 세 차례나 갔다고 하나 강치를 구별 못하고 무서워 할 정도라면 울릉도 정상에는 오르지 않았다고 본다. 이와 같이 울릉도를 육지에서 본 모습, 해안에서 본 모습 그리고 김유립처럼 산에 올라도 큰 산만 본 모습 등이 있다. 그러므로 조선전기의 삼봉도에 관한 기록은 장한상처럼 직접 정상에 올라 본 모습은 없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 같으며 사람들마다 보는 모습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429년 세종 때는 양양 앞바다의 요도를 찾기 시작하였고, 1470년 성종 때는 또 다른 삼봉도 찾으려고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1480년 수색을 멈추고 포기하였다. 요도 항해는 함경도 영흥만 주변의 어민들이 연안 항해를 하면서 통천, 장전, 양양 대청봉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대청봉(1708m)을 뒤로하고 태양을 가늠하여 약 200km 떨어진 남동쪽으로 사선항해를 하면서 울릉도를 항해하였을 것이다. 북서풍이나 서풍이 부는 맑은 날 항해하면 하루 만에 절반 이상 갈 수 있으므로 영흥만에서 양양을 거처 대풍감까지 약 365km는 순풍을 만나면 약 23일 걸린다. 북쪽 해민들의 이정표는 양양 설악산이라고 추정하며, 이곳을 중심으로 항해하였으므로 양양 앞바다에 새로운 섬이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울릉도 해역에서 기상이 나빠지면 북서풍과 해류를 타거나 야간에는 울릉도를 지나쳐 독도에 다다를 수 있다.

독도는 울릉도에서도 약 90km 동동남(107° 辰方) 쪽으로 떨어져 있다. 독도의 이름은 우산도(于山島자산도(子山島송도(松島가지도(可支島) 등으로 불리다가 1900년에 석도(石島), 1906년부터 독도(獨島)라 부르게 되었다.(주9)

17875월 맑은 날에도 프랑스 라페루즈 원정대(주10)가 동해상을 탐사할 때, 울릉도를 발견했으나 일본으로 가면서 독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 함흥의 김남련(주11)1430년에 요도에 갔다 왔다고 하였고, 김한경은 1470년대에 세 차례 이상 삼봉도(주12)에 다녀왔다고 한다. 대부분 울릉도를 다녀왔겠지만, 그중에 한 번쯤은 기상악화로 독도 근처까지 와서 독도를 확인하고 갔을 것이다. 그래서 독도의 특징이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있기 때문에 또 다른 삼봉도의 전설이 생겼다고 추정한다.

1476년 김자주와 김한경의 함길도 항로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경원 말응대(말응대진)에서 정남항해를 하였다. 동해에서 가장 긴 항로(528km)로 순풍 항해만 할 수 없다. 4일간의 지친 항해로 피곤하였지만, 울릉도 북동쪽의 삼선암과 관음도, 죽도, 강치 등의 모습을 처음 본 것처럼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김자주와 김한경 일행은 전에 삼봉도(독도) 인근에 왔을 가능성이 높아 또 다른 삼봉도의 전설이 생겼다고 추정한다.

삼봉도(독도) 항해는 맑은 날에는 울릉도가 먼저 보이므로 갈 수 없지만, 황천(荒天)에서는 시야가 좋지 않으므로 북서풍과 해류 또는 야간 항해로 울릉도를 지나 갈 수 있다. 다행히 작은 섬을 발견하였으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섬에는 포구도 없고, 식수(주13) 없고 올라가기도 힘든 돌섬이었다.

조선 전기의 요도와 삼봉도에 관한 연구는 손승철, 유미림, 정연식 등의 학자들에 의하면 요도와 삼봉도의 실체를 울릉도로 파악하고 있다. 특히 정연식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도와 삼봉도를 검증하여서 길주의 난도와 통천의 난도는 요도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요도탐사대의 울릉도 항로는 연구자와 다르다. 그리고 선우영준은 독도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근거가 미약하다.(주14)

 

연구자는 요도와 조선 전기의 삼봉도는 독도라고 추정한다.

첫째, 울릉도는 바다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사진 7>과 같이 형태가 비슷한 꾸불꾸불한 하나의 산으로 보인다. 울릉도는 예로부터 우산국, 우릉도, 무릉도 등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조선 전기의 함길도(영안도)에 소문난 삼봉도는 독도라 추정한다. 독도 삼봉도를 찾지 못하자 무릉도가 삼봉도로 변질되었다고 본다.

둘째, 독도는 주봉인 서도의 대한봉(168.5m)과 탕건봉(97.8m), 동도의 우산봉(98.6m) 세 개의 봉우리가 뚜렷하여 독도에 갔다 온 사람은 삼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요도(蓼島)를 뜻풀이하면, ‘고난의 섬(여뀌 섬)’이다.(주15) , 울릉도를 가다가 태풍이나 돌풍을 만나 황천 항해를 하여 독도에 가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온 사람들이 지은 섬 이름으로 바닷가의 어민들에게 인구회자(人口膾炙)되었다.

 

2017, 독도 주민 김성도씨(주16)는 독도 주위에 표류하는 북한 어선을 발견하여 어부들을 자기 집(어민숙소)으로 데리고 와서 독도경비대에 신고하였다. 식사를 하면서 여기에 살겠는가?”라고 물었더니, “고향에 처자식이 있어 가야하겠다.”고 하였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원산이라고 하였다.(주17) 북한 어부들은 동해해경에 인계되어 판문점을 통하여 북송되었다.(주18) 다섯 명의 어부들은 고향에 가서 독도라는 이름을 모른다면 어디에 갔다 왔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2018년 홋가이도 TV에서 홋가이도에 표류한 북한어선이 155척이라고 방송하였다.(주19) 이와 같이 북쪽 해민들이 큰 바람을 만나 동해상에서 표류하여 운 좋게 살아 돌아간 사람들이 독도를 요도, 삼봉도, 돌섬이라 소문내었을 것이다. 북쪽 어민들은 다시 요도나 삼봉도로 가려고 하였지만, 실제 삼봉도(독도)는 찾지 못하고 무릉도에 갔다 온 것이 삼봉도로 소문나서 무릉 삼봉도의 전설이 생겼다고 추정된다.

 

 

사(四)방향(동서남북)에서 본 울릉도 /촬영=이효웅
사(四)방향(동서남북)에서 본 울릉도 /촬영=이효웅

 

3) 경상도와 전라도 어민들의 울릉도·독도 항해

 

안용복(주20)1693년과 1696년에 영해 축산항에서 두 차례나 울릉도를 거처 일본까지 도항하였다. 18세기 말부터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어민들은 울릉도에 가서 어렵을 하고 황죽을 베거나 배를 만들어 오면서 울릉도는 보물섬으로 소문이 났다. 특히, 전라도의 거문도·초도·흥양 등의 어민들은 거제도-부산-울산을 거처 흥해나 축산항에서 남서풍과 동한난류를 이용하여 울릉도까지 약 162km48° 동북쪽으로 사선항해를 하였다. 그리고 남쪽 어민들 중에는 울릉도를 다니다 태풍이나 돌풍을 만나서 독도까지 가 보았거나 독도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자료9] 우청도 이야기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주21)윤속 삼척부사는 병진년(1796) 7월에 상경하여 사직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번 복귀를 재촉하는 교지를 내렸지만 굳게 사양하여 임금의 뜻을 거부하다 파직 당했다. 윤속 부사는 우릉(羽陵)의 팔륜아 사건(八倫兒事件)으로 서리를 신문하였는데, 그 서리(書吏)가 올린 원정(原情)에서 말하기를 우청도(羽淸島)는 망망한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그 섬이 삼척지방에 소속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찍이 몰랐던 일이다.”라고 하였다.’(주22)

 

척주선생안우릉팔륜아 사건(주23)은 윤속 부사 부임 이전 1787(정조 11)에 울산 어민 14명이 울릉도에 가서 어복과 향죽을 몰래 훔쳐 나오다 삼척부 포구에서 붙잡힌 사건으로 주범과 종범으로 나눈 것 같다. 서리가 취조하는 과정에서 어민들은 망망한 동해바다 가운데 있는 우청도(독도 추정)’ (주24)(주25)까지 갔다 온 것으로 추정된다.

어민들 사이에서는 예전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다니면서 우청도를 알고 있었고, 그 섬은 울릉도와 마찬가지로 삼척에 소속된 섬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리들은 우청도를 몰랐고 이 사실은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져 보고되지 않았다. 그 후 윤속 부사의 재조사로 서리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서리가 올린 원정에 예전의 우청도 이야기가 나왔다고 본다. 이 이야기는 보고되지 않아 사료에서 빠졌으나 삼척의 사찬지척주선생안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울산이나 남쪽의 어민들은 울릉도를 다니면서 기상이 나쁘면 풍랑과 해류로 우청도까지 가게 되었고, 이런 이야기는 관에서는 모르지만 삽시간에 어민들 사이에 퍼져 해중의 돌섬 독도를 알게 되었다고 본다(로 계속)

 

우청도(독도) /촬영=이효웅
우청도(독도) /촬영=이효웅
독도에서 본 울릉도 /촬영=이효웅
독도에서 본 울릉도 /촬영=이효웅

 


주1) 주강현, 독도견문록, 웅진싱크빅, 2008, 26.

주2) 『성종실록16, 성종 419일 경자.

주3) 『성종실록, 한국고전번역원DB, 성종7(1476) 1027, 07-10-27[02], 원전9391. 1022일 기사에는 경성에서 43야에 울릉도에 갔다고 하였다. [자료7] ‘요도탐사대 김자주의 보고를 연구자가 요약했다.

주4) 성종실록 72, 성종 71022일 임진 3번째 기사.

주5) 주강현, 독도강치 멸종사, 2016, 50. 일본인이 조사한 독도 강치의 모습은 암수 비율은 일부다처다. 수컷 한 마리에 암컷 30마리 정도 비율이다. 수컷은 큰 것은 1, 몸무게는 150관 나가는 것도 있다. 암 컷은 큰 것은 6척 정도로 암수 모두 처음에는 회색이지만 성장하면서 회백색으로 변한다. 수컷은 검은색이 많다.”

주6) 연구자는 울릉도 바다동굴 탐사(2015년 외)를 여러 차례 하였다. 울릉도의 와달리와 내수전 사이에는 해식동굴이 6개 정도 있다. 어떤 동굴은 몽돌광장으로 되어있는데, 이런 곳은 가재(강치)들의 서식지와 보금자리였다.

주7) 박세당(朴世堂,16291703)의 서계잡록(西溪雜錄, 1659)의 울릉도(鬱陵島).

주8) 손승철, 박미현 편저, 앞의 책, 404409. 서계잡록울릉도를 연구자가 요약했다.

주9) 국회도서관, 울릉도 독도 명칭. dokdo.nanet.go.kr/dokdo/front.dokdo?menu=namehistory4

주10) 『라페루즈의 세계 일주 항해기』 Ⅰ, 국립해양박물관, 번역총서 1, 2016, 526.

주11) 『세종실록, 한국고전번역원DB, 세종12(1430) 126, 원전3214. “요도(蓼島)에 가 본 사람이나, 이 섬에 대하여 보고 들은 사람을 모두 찾게 하니, 함흥부 포청사에 사는 김남련이 요도에 갔다 왔다고 하였다.”

주12) 『성종실록, 성종7(1476) 622, 원전9354, 경성(鏡城)의 김한경(金漢京) 2인이 신묘년(1471) 5월에 삼봉도(三峰島)에 표박(漂泊)하여 섬사람들과 만나고 왔다.

주13) 물골 샘물: 독도에는 서도 물골 동굴에서 짠맛이 나는 샘물이 나온다. 이곳은 서도 뒤쪽에 있어서 찾아가기 어렵고 찾더라도 갈매기, 강치 등의 분비물로 식수가 힘들다. 현재는 콘크리트 수조를 만들었고 철망으로 막아 놓았다.(2002, 2009, 2017년에 연구자가 직접 답사함).

주14) 손승철, 조선전기 요도와 삼봉도의 실체에 관한 연구, 한일관계사연구44, 2013, 57~78. ; 정연식, 15세기의 蓼島, 三峯島와 울릉도, 조선시대사학보92, 2020, 41~94. ; 유미림, 울릉도독도의 명칭 변천과 독도인식의 연속성, 해양정책연구 2021년 겨울호362, 34~37. ; 선우영준, “조선 성종때 발견한 삼봉도는 독도가 맞다”, 한겨레(2007.10.27.).

주15) 蓼(여뀌 료())의 뜻은 여뀌(마디풀과 한해살이풀), 괴로움, 분란한 모양. 독초(고기잡이로 사용). 정연식은 여꾀섬의 여꾀가개/가게의 발음이 변질된 결과로 보인다고 하였는데, 연구자는 고난이라고 해석한다. 1253년 가을, 이승휴는 몽골 침입에 대항하여 삼척의 산성에서 오랫동안 피난하면서 괴롭고 고단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무릉도를 보고 시를 읊고 蓼田山城에서 보았다고 하였다.

주16) 김성도씨는 최종덕씨에 이어 독도 지키미로 살다가 20181021일 별세하였다.

주17) 오문수, 흉허물 없는 사람 있소?, 비지아이, 2021, 174.

주18) “북한 선박은 기관 고장으로 동해를 표류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5명의 북한 선원들은 모두 북측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기사, 2017.02.15.).

주19) 이효웅, 해류병 실험을 통해 본 이사부함대의 동해 항로, 이사부와 동해16, 한국이사부학회, 2020, 236.

주20) 『숙종실록, 숙종 20년 갑술(1694) 223, 원전39293.

주21) 『척주선생안은 삼척지방 수령을 거처 간 역대 관리들의 명단으로 여기에는 삼척 지역의 모든 분야의 중요 사실들을 기록하였다. 1855(철종5) 강릉 김씨 한길댁 김구혁이 개서하였다. 아래 책, 15.

주22) [자료8]은 배재홍 역, 국역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 삼척문화원, 2003, 130쪽의 내용을 연구자가 요약하였다.

주23) 승정원일기 1630(탈초본 86) 정조 11725일 경인 12/47 기사(慶尙道蔚山海尺秋㗡乭·崔潛乭等, 率格軍十四名, 潛入鬱陵島). 추잇돌, 최잠돌 곁군 등 14명 중 주범과 종범으로 나누어 주범 8명을 팔륜아로 분류한 것 같다. 이 사건을 척주선생안당시의 기록자(김효지?)17967월에 윤속 부사가 사직한 내용을 앞에 기록하여, 사직 후에 울릉도에 가서 우릉팔륜아 사건을 처리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주24) 이효웅, ‘독도의 다른 이름 우청도’, 서울신문(2002,12,19.) 30연구자는 우청도(羽淸島)의 우()는 두 개의 섬이 멀리서 보면, 새가 양 날개를 펼친 모습으로 보이고, ()은 독도에 올라보면 동도와 서도 사이가 2-3m정도로 얕기 때문에 맑고 푸르게 보이기 때문에 양 날개를 펼친 맑고 푸른 섬이라는 뜻으로 작명하였다.’고 본다.

주25) 우청도(羽淸島), 삼척군, 삼척군지, 강원일보사출판국, 1984, 825.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