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에 저항한 영국 부디카 여왕
로마제국에 저항한 영국 부디카 여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1.0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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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동부 장악하고 런던으로 진격했으나 패배…영국의 상징으로 부상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2세 여왕.

영국은 여왕의 나라인가. 그렇지는 않다. 엘리자베스 1,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할 때 영국은 번성했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어려운 시기를 무난히 넘긴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 고대 역사에 전설적인 여왕이 있는데, 이름이 부디카(Boudicca). 공식적으로 부티카는 왕비였고, 반란군을 이끌었지만 여왕에 등극하지는 않았다. 다만 역사가들이 그녀를 여왕이라 부른다. queen이란 영어단어가 여왕인지, 왕비인지 구별되지 않는 것도 이유일 것이다.

부디카 /위키피디아
부디카 /위키피디아

 

로마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55년과 54년 두차례에 걸쳐 브리튼을 침입했지만 켈트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딛쳐 철수하고 말았다. 독일 북부에 거주하던 앵글로색슨족이 건너오기 전이어서 브리튼 섬에는 켈트족이 살고 있었다.

한세기 후 AD 43년 로마의 클라디우스 황제는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장군에게 4만명을 주어 브리튼을 침공케 했다. 브리튼섬 동부의 작은 이케니(Iceni)왕국을 다스리던 프라수타구스 왕은 로마군에 협조적이었다. 그는 로마의 제국적 지위를 인정하면서 속국으로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로마도 켈트족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우호적인 부족들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채택했다. 클라디우스 황제는 켈트족에게 돈을 후하게 지원해 주었다. 이케니 왕국에도 황제의 하사금이 내려갔다. 그런데 브리튼 총독 데키아누스가 그 돈을 횡령했다. 돈이 부족한 켈트족은 로마인 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케니 왕국은 세네카에게 빌렸다. 세네카는 후대에 로마의 정치가, 철학가로 유명한데, 고리대금으로 큰 돈을 버는 이중인격자였다. 세네카는 브리타니아 지역에 4,000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액의 돈을 대출했는데, 회수할 때엔 가혹하게 징수해 원성을 사고 있었다.

 

AD 54년 로마 황제가 클리디우스에서 네로로 바뀌었다. 프라수타구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네로 황제와 자신의 두 딸이 왕국을 공동통치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프라수타구스는 AD 60~61년 사이에 죽었다. 그러자 로마는 본색을 드러냈다. 로마는 이케니 영토를 몰수해 직할지로 만들어버렸다. 프라수타구스의 왕비 부티카가 항의하자 로마군대는 그녀를 끌고가 채찍질하고, 두 딸을 능욕했다.

로마 총독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는 웨일스 북쪽 앵글시 섬으로 출정해 브리튼 섬 동부에 군사력 공백이 생겼다. 부티카는 이케니족과 트리노반테스족 여러 부족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세력은 트리노반테스족의 수도였던 카물로두눔(오늘날의 콜체스터)과 베룰라미움(세인트 올번즈)을 점령하고, 론디니움(런던)을 향해 진격했다. 반란은 삽시간에 동부 일대로 번졌고, 로마인과 로마군 7만명이 살해되었다.

 

부디카 반란지역 /위키피디아
부디카 반란지역 /위키피디아

 

웨일스에 가 있던 수에토니우스는 군대를 회군시켰으나, 숫적으로 우세한 부디카의 반란군에 패했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오늘날의 웨스트미들랜즈에서 병력을 다시 끌어모아 와틀링스트리트 전투에서 부디카가 이끄는 반란군을 패퇴시켰다. 당시 네로 황제는 사태가 악화될 경우 브리튼섬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방안도 고려했지만, 수에토니우스의 군대가 선전하자 로마의 지배권을 유지했다.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로마군은 잔혹하게 복수를 했다. 제국군은 8만명의 켈트족을 살해했다. 부티카도 죽었다. 부디카의 죽음에 대해 자살했다는 설, 로마군에게 생포되었다는 설, 병사했다는 설 등 다양하다. 영국인들은 적군에 치욕스럽게 살기보다는 자살을 선택했다는 설을 믿는다.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부두 위의 ‘부디카와 두 딸’ 동상 /위키피디아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부두 위의 ‘부디카와 두 딸’ 동상 /위키피디아

 

부디카에 관한 스토리는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로마 편년기와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에 기록되어 있다. 르네상스 시기인 15~16세기에 영국인들이 로마 시대 서적을 접하면서 부티카라는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로마 역사서에 적혀 있는 보아디케아(Boadicea)를 부디카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부디카는 빅토리아 여왕 재위 기간(1837~1901)에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다. 부디카는 영국인의 영웅으로 부상했고, 문필가, 역사학자들은 빅토리아 여왕을 제2의 부디카로 추앙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부디카는 켈트족으로 당시 영국의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인들의 조상이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대영제국은 부디카를 자기네 종족의 인물로 둔갑시켜 로마제국에 저항한 인물로 만들었던 것이다.

부디카와 두 딸의 동상은 영국 의사당 근처 웨스트민스터 부두 위에 서 있다.

 


<참고자료>

Wikipeidia, Boud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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