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 시대의 작은 반란, 노원구 한글비석
사대부 시대의 작은 반란, 노원구 한글비석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1.02 12: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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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에 새긴 최초의 한글 석비…한글 모르는 뭇백성에게 경고한 안내문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한글비석로는 불암산 자락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진다. 그 서쪽엔 중랑천이 흘러 배산임수의 묘자리로 좋은 곳이다. 병자호란 때 문신이었던 벽진이씨 충숙공묘역이 이곳에 있다.

가을 바람에 낙엽이 뒹구는 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면, 서라벌고등학교 건너편에 이윤탁 한글영비가 나타난다.

 

보호각을 씌운 이윤탁 한글영비 /박차영
보호각을 씌운 이윤탁 한글영비 /박차영

 

묘지의 주인 이윤탁(李允濯)은 그다지 높은 관직에 있거나 세도가의 집안은 아니었다. 조선 제11대 중종 때 외교문서를 담당한 승문원의 부정자(副正字)를 지낸 사람이다. 부정자라는 직위는 종9품으로 말단 관리였다.

원래의 묘는 1535년 지금의 태릉에 조성되었으나, 문정왕후 윤씨의 묘를 그 자리에 만들면서 이곳에 있는 부인 고령 신씨(申氏)의 묘와 합장하면서 묘비의 비문을 짓고 글씨를 새겨 1536(중종 31)에 세웠다.

비석이 유명해진 것은 한글이 새겨진 우리나라 최초의 석비이기 때문이다. 비문은 윤탁의 셋째 아들 문건(文楗)이 지었다. 앞면, 뒷면, 오른쪽 측면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고, 왼쪽 측면엔 한자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한글을 써 놓았다. 한자 비문은 일반 비서과 비교해 특이한 내용이 없다. 후대인들이 관심을 끈 것은 한글로 쓰여진 왼쪽 측면의 비문이다.

탁본 /문화재청
탁본 /문화재청

 

좌측 비문에 비석의 명칭이 영비(靈碑)라고 한자로 쓰여 있다. 신령스런 비석이란 뜻이다. 이 글자 빼고는 한글로 쓰여 있다. 한글은 이렇게 되어 있다. “녕ᄒᆞᆫ 비라 거운 사ᄅᆞᄆᆞᆫ ᄌᆞㅣ화를 니브리라/ 이ᄂᆞᆫ 글모ᄅᆞᄂᆞᆫ 사ᄅᆞᆷᄃᆞ려 알위노라고 쓰여 있다. 해석하면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므로 훼손하는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 이를 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알리노라는 뜻이다.

묘비의 오른쪽에 한자로 불인갈(不忍碣)’이라고 새긴 큰 글자 밑에 두 줄로 비슷한 내용의 경고문이 적혀 있다. “爲父母立此 誰無父母 何忍毁之 石不忍犯 則墓不忍凌 明矣 萬世之下可知 免夫”(부모를 위하여 이것을 세우는 것이니, 누구인들 부모가 없겠으며 어찌 차마 이것을 훼손시키겠는가. 비석을 차마 범하지 못한다면 묘도 차마 능멸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한글 모양은 지금도 읽을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다. 비석에 쓰인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 해례본용비어천가서체의 중간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한글이 창제된지 90년만에 쓰여진 한글 비문은 당시로는 대단히 용기 있는 일이었다. 한글을 언문이라 비하하던 시절에 무덤 주인의 아들 이문건은 자신이 속한 사대부 세계에 작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권세있는 사대부들에겐 한자로, 한자를 배우지 못한 무지렁이들에겐 한글로 자기 아버지 무덤을 아껴달라고 부탁했다.

 

묘비가 문화재 대우를 받기 전에 노천에 그냥 드러나 있었다. 지붕돌이나 거북받침도 없는 가난한 선비 집안의 비석일 뿐이었다. 도로가 조성되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15m 뒤쪽으로 옮겨졌다. 묘비 앞 자리는 뭉툭 잘려 나가고, 묘지만 겨우 살려 놓았다. 계단을 설치해 겨우 올라갈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천대받던 비석이 1974'한글고비'라는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에 국가지정 보물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비석에는 보호각도 두르고, 1998년에는 번역문을 새긴 새 비석을 묘소 앞에 세워 놓았다.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후 조선시대에 한글로 비석을 새기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한글 비석은 현재 3점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글 비명은 당대에 시대를 거스르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우리 문화를 살 지운 신선한 행동이었다.

 

보호각을 씌우기 전의 한글고비 /문화재청
보호각을 씌우기 전의 한글고비 /문화재청
한글영비의 좌측면 /박차영
한글영비의 좌측면 /박차영
새로 만든 현대 비석의 좌측면 /박차영
새로 만든 현대 비석의 좌측면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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