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서 강원·충청으로 가는 길목에 살곶이다리
한양서 강원·충청으로 가는 길목에 살곶이다리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1.04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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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거치며 다소 변형됐지만 600년 숨결 간직한 다리…이성계 전설도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살곶이다리는 성동교를 비롯해 고가도로, 이름 모를 여러 다리, 고층건물들에 둘러싸여 왜소해 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장 멋지고 최신의 기술로 만들어진 다리였다.

살곶이다리라는 이름에서부터 600년 역사의 사연이 스며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속을 썩이는 이방원의 꼴이 보기 싫어 고향인 함흥으로 피해 있다가 아들이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한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버지가 온다는 소식에 이방원은 뚝섬 근처로 마중을 나갔다. 아들을 보는 순간, 이성계는 화가 치밀어 활을 들고 쏘았다. 이성계는 명궁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방원이 큰 기둥 뒤에 몸을 피하는 바람에 화살은 그 기둥에 꽂히고 말았다. 아버지는 저 놈은 하늘이 돕는군하며 포기하고 궁궐로 돌아갔다. 그 후 그곳을 화살이 꽃힌 곳이란 뜻으로 살곶이라 했고, 다리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살곶이다리 전경 /박차영
살곶이다리 전경 /박차영

 

다리 건설은 세종의 효심에서 시작되었다. 임금자리를 셋째 아들에게 물려준 후 태종은 형님인 정종과 함께 살곶이와 광나루 근처로 자주 샤냥을 나갔다. 이를 방응행차(放鷹行次)라 하는데, 근처 응봉산도 조선 임금들의 매 사냥터였다. 상왕 둘이 중랑천을 건너느라 신하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세종은 이를 딱히 여겨 개천에 다리를 놓으라고 명했고, 1420(세종 2) 5월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석재를 운반하는 게 힘들었고, 교량건설 기술도 부족한데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곧이어 상왕이 세상을 떠나며 다리 공사는 중단되었다.

공사가 재개된 것은 성종 때였다. 이곳은 교통의 요지였다. 광나루를 지나 경기도 이천으로 가서 강원도 강릉에 닿았고, 그 중간에 충청도로 빠졌다. 성종은 백성을 위해 다리 공사를 명령했는데, 당대 뛰어난 토목기술자였던 한 승려가 지휘, 감독함으로써 다리는 성종 14(1483)에 완성되었다. 다리는 길이 75.75m 6m인데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다. 성종은 편편한 반석을 건너는 것 같다해서 제반교(濟盤橋)라 명명했다고 한다.

제반교가 언제부터 살곶이다리로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고장 지명이 살곶이벌(箭串坪)이라는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다리의 서측 부분 /박차영
다리의 서측 부분 /박차영

 

다리가 건설되면서 뚝섬 일대가 말을 기르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뚝섬은 이름은 섬이지만 실제는 벌이다. 이곳은 한강과 중랑천의 범람원으로,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게 자라 나라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사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다. ()은 깃발을 의미하는데, 군대가 둑기(纛旗)를 세우고 사열하던 곳이라 하여, 독섬이라 했다가, 소리가 바뀌어 뚝섬이 되었다.

다리에 돌난간은 없다. 좌우교대는 장대석 석축이고 중간에 교각 석주 21열을 세우고 1열에 기둥 네 개를 배치했다. 기둥은 물흐름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되어 있다. 교각 위에 하천방향으로 멍에돌을 3개 연이어 걸치고 멍에돌 위에 귀틀돌을 가로 걸쳐 놓은 구조로 되어 있다. 교각 4개 중 가운데 2개의 교각을 15~40가량 낮게 만들어 다리의 하중이 안으로 쏠리게 하여 안정을 꾀했다.

 

다리 하부 /문화재청
다리 하부 /문화재청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로로 충실하게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으면서 모자라는 석재를 보충하기 위해 다리 석재의 절반을 가져다 썼다는 말이 있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어쨌든 그후 이 다리는 훼손되어 갔고, 일제 시기인 1913년에 상판에 콘크리트를 발라 땜질 보수를 해버렸다. 1920년대 장마 때 다리 일부가 유실된 채 방치되다가 19385월에 그 옆으로 성동교가 세워지면서 다리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1971~72년에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면서 일제가 발라놓은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복원했다. 그후 강폭이 넓어져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다리를 연장 증설했다. 1987년 제방도로를 왕복 5차선의 도로로 조성하면서 북측교대와 교각 일부가 매몰되었다.

문화재청이 1967년 살곶이다리를 사적 제160호로 지정한데 이어, 201112월에 보물 제1738호로 승격, 지정했다.

서울 성동구가 2013년에 북측 교대 발굴과 복원사업을 추진해 공사를 마무리했다. 현재 살곶이다리는 관광자원으로서 보행로로 사용되고 있다.

다리의 서쪽 끝에는 상판석과 귀틀석이 원형 보존하고 있다.

 

살곶이 대리 부재 저장소 /박차영
살곶이 대리 부재 저장소 /박차영
성동교에서 본 살곶이다리 /박차영
성동교에서 본 살곶이다리 /박차영
동측 상판 /박차영
동측 상판 /박차영
​동측 상판 /박차영​
​동측 상판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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