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관 홍순언과 중국 기녀 류씨의 인연
조선 역관 홍순언과 중국 기녀 류씨의 인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11.0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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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 해묵은 종계변무, 임진왜란 때 명군 파병 해결했다는 야사

 

조선시대 역관은 통역관이면서도 외교관이었다. 동시에 정보원 역할도 했고, 무역상이자 문화인, 골동품 감식가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역관 중에 세간에 가장 회자된 인물이 홍순언(洪純彦, 1530~1598)이다. 그는 200년 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왕실의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하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구원군 파견을 성사시킨 장본인이다. 이러한 공로로 그의 관직은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사후에 조선에서는 판중추부사에 추증되고, 명나라에서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의 직위를 받았다.

그의 스토리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기록되기 시작해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익의 성호사설 등에 전해지면서 부풀려 졌다. 다소 과장되어 있다고 할지언정, 그에 관한 야담은 어떤 형태이든 팩트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하며 들으면 흥미롭다.

 

명종 때 홍순언은 사신을 수행해 명나라 수도 연경의 홍등가를 구경하다 한 기방 앞에 하룻밤 자는데 은자 1천 냥이라고 쓰여 있는 안내문을 보았다. 어떤 기녀이길래 1천냥이나 불러? 그는 호기심이 동해 기방에 들어가 그 기녀를 불렀다. 여인은 저의 부친이 억울하게 나라에 죄를 지어, 은자 1천 냥이 있어야 구명이 됩니다. 부친을 살리기 위해 제 몸을 팔 수 밖에 없습니다.”고 했다. 류씨라고만 알려진 그 여인은 지극히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기품이 있었다.

이 대목에서 야사는 비약한다. 홍순언은 그 여인과 하룻밤을 포기하고 인삼을 판 돈과 비단을 사기 위해 가지고 온 돈을 털어서 낭자에게 주었다. 여인은 홍순언이 준 돈으로 어려움을 해결했다.

 

세월이 흘러 조선에 선조가 임금이 되었다. 1584년 선조는 주청사를 보내면서 200년 동안 해묵은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반드시 해결하라고 염명을 내렸다. 종계변무란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가 당시 정치적으로 반대파였던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하려 한 일이다. 개국 이후 10여 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해결되지 않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조정은 이 문제에 매달려 있었다.

사절단의 역관은 홍순언이었다. 사절단이 연경에 도착했을 때 명나라 예부상서 석성(石星)이 조선사절단의 역관을 찾았다. 예부상서는 지금의 외교장관이다. 조공관계가 분명하던 시절에 조선사절단에겐 중국 예부상서는 황제 다음으로 절절 매던 위치의 고관이었다. 사연인즉, 홍순언이 돌보아준 여인이 석성의 후처가 되어 있었고, 류씨 부인은 남편에게 조선 역관의 선행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석성은 홍순언을 찾아 부인의 은혜를 갚을 요량이었다.

홍순언은 석성을 만나 종계변무로 왔다고 설명하고 해결을 부탁했다. 석성은 석성의 부탁을 쾌히 들어주었고, 이로써 200년 끌어오던 골칫거리를 해결하게 되었다. 선조는 크게 기뻐해 중인 신분이었던 홍순언을 당성군(唐城君)에 책봉했다. 역관으로는 최초로 공신 작호를 받은 것이다.

이후 명나라로부터 홍순언의 한양 집에 비단짐이 도착했는데, 이 비단에 보은(報恩)이란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고 한다. 석성의 부인이 한 땀 한 땀 비단에 글자를 수놓아서 조선으로 보낸 것이다. 홍순언이 있던 마을은 보은단동(報恩緞洞, 현재 서대문구 미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명나라에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조선 사신을 전송하는 내용의 그림, 송조천객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국립중앙박물관
명나라에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조선 사신을 전송하는 내용의 그림, 송조천객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국립중앙박물관

 

8년후 임진왜란이 터졌다. 임금은 의주로 피난하고 조선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홍순원은 청병 사신을 따라 연경에 갔다. 당시 연경에는 조선이 왜군의 앞잡이가 되어 명나라를 쳐들어올 것이라 루머가 돌고 있었다. 석성이 명나라 병부상서기 되어 있었다. 홍순언은 석성에게 조선이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조국 정벌 음모를 거절하다가 침략을 당했다며 설명했고, 석성은 그의 말을 신뢰해 원군 파병을 결정했다고 한다.

명나라는 군사 5만명에 이여송을 장수로 파견했다. 선조가 이여송을 만날 때에도 홍순언이 통역했다고 한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는 1598년에 향년 68세로 병사했다.

 

홍순언의 스토리는 팩트체크에서 오류가 발견된다. 중국 고위관료인 석성의 관직이 스토리 전개에 맞지 않는다. 국내 야사 저자들이 스토리를 부풀린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숭명(崇明)사상이 확대되며 사대부들 사이에 파병의 주인공 석성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의 상대로 홍순언도 미화하게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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