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 임금 종아리 때렸다는 문정왕후의 무덤
태릉, 임금 종아리 때렸다는 문정왕후의 무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1.10 13: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을사사화, 임꺽정 발호 등 혼탁한 정정…능선 건너에 아들 명종 부부의 강릉

 

명종 2(547) 918, 경기도 양재역 벽에 붉은 글씨로 쓰여진 대자보 한 장이 붙었다. 벽보에는 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라고 쓰여 있었다. 해석하자면, “여왕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단하니 나라의 멸망을 서서 기다릴 만하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였다.

여주(女主), 즉 여왕은 누구인가. 바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지칭했다.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이 벽보를 뜯어서 임금에게 올렸다. 정치 문제로 비화시켜 정적을 제거하자는 심산이다. 이로 인해 피바람이 불었으니, 역사가들은 이를 양재역 벽서사건이라 한다.

 

문정왕후 윤씨(1501~1565)는 조선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다. 중종은 세 명의 정비를 두었는데,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 신씨로,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권신이라는 이유로 남편이 반정으로 왕이 된지 8일만에 폐위되었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단경왕후가 남편을 그리워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는 반정세력 윤여필의 딸로, 중종 10(1515)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가 윤지임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

문정왕후는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되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16살에 왕비가 되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18년 후인 34세의 나이에 아들을 보았으니, 경원대군(명종)이다. 그런데 전왕비가 낳은 세자가 있었다. 그가 왕이 되면 자신과 아들의 신변이 위태로울수 있다. 문정왕후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자기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지지층을 모았다. 이리하여 대신들이 전왕비 소생인 세자를 지지하는 파벌과 경원대군을 미는 파벌로 나누어졌다.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모두 파평 윤씨 가문이었다. 하지만 같은 종씨라도 권력은 나누어 갖길 싫어 했다.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대윤, 소윤으로 나뉘어 서로 누님이 낳은 왕자를 끼고 충돌했다.

1544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인종이 임금이 되어 9개월만에 승하하고 경원대군이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명종 즉위 직후에 소윤이 대윤을 제거하는 사화가 일어났으니, 을사사화(1545). 그로부터 2년뒤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또 피바람이 불었다. 문정왕후가 여주가 되어 세상을 좌지우지한 것이다.

 

태릉 능침 /문화재청
태릉 능침 /문화재청

 

문정왕후의 무덤이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泰陵)이다. 선수촌, 골프장, 육사 등으로 태릉은 알아도, 그 옆에 있는 강릉(康陵)을 아는 사람은 드믈다. 문정왕후가 낳은 아들 명종과 그의 왕비 인순왕후 심씨가 합장된 무덤이 강릉인데,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불암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두 능을 합쳐서 태강릉, 또는 태릉과 강릉으로 부르기도 한다.

 

문정왕후는 포악스럽고 고집이 강한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그에 비해 아들 명종은 심약한 마마보이였다. 어머니 문정왕후는 곤룡포를 입은 임금의 종아리에 매질을 가하고, 어전에서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다고 한다. 문정왕후는 아들이 나이 20살이 되던 해에 공식적으로 수렴청정을 그만두었으나, 정사에서 손을 놓지는 않았다. 명종 20년에 죽을 때까지 문정왕후는 아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사실상 여왕으로 군림했다.

문정왕후가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에 권력은 부패하고 백성은 피폐했다. 굶주린 백성은 크고 작은 도적떼가 되었는데, 그 중 유명한 도적이 임꺽정이다.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 윤원로는 반대파를 유배 보내거나 죽이는 숙청을 대대적으로 감행했다. 당대 유학자 조식은 벼슬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에 이렇게 표현했다.

"자전(慈殿, 문정왕후)께서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이러한 직설에도 조식은 무사했다. 강직한 선비를 주살했을 경우 역풍을 고려했을 것이다.

 

태릉 홍살문과 정자각 /박차영
태릉 홍살문과 정자각 /박차영

 

문정왕후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이 묻힐 곳을 정했다. 남편 중종의 왕릉은 서삼릉에 장경왕후와 함께 조성되어 있었다. 문정왕후는 죽기 3년전인 명종 17(1562), 봉은사 주지 보우스님과 의논해 중종의 무덤을 파서 성종의 무덤인 선릉 옆으로 옮겨 묻으라고 했다. 지금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이 이렇게 조성되었다. 문정왕후는 남편 무덤을 전 왕비에게서 떼내 그 옆에 자신이 묻힐 것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중종의 무덤 부근 삼성동 일대는 홍수만 나면 물이 정자각 앞까지 차올랐다. 명종 20(1565), 문정왕후가 죽자 아들 명종은 지금의 태릉에 능을 조성하게 되었다.

 

태릉은 왕비만 묻힌 단릉(單陵)이지만, 말 그대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왕릉 규정을 정한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갖출 것을 모두 갖추었다.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에는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을 새겼고, 만석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그 밖에 석양, 석호,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을 봉분 주위와 앞에 배치했다. 문석인은 두 손으로는 홀()을 공손히 맞잡고 있다. 능침 아래에는 홍살문, 판위,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었으며,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

 

태강릉 갈참나무 숲길 /박차영
태강릉 갈참나무 숲길 /박차영

 

명종의 무덤인 강릉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언덕 하나를 넘으면 있다. 두 왕릉 사이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낙엽이 떨어질 무렵 태강릉 사잇길엔 갈참나무 낙엽이 수북했다.

명종 대에 정치적 혼란은 극심했고,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임꺽정은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들을 빈민에게 나눠주며 의적 행각을 벌였다. 그들은 1559(명종 14)에 개성까지 쳐들어가기도 했다.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들은 이렇게 썼다.

국가에 선정(善政)이 없고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延命)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강릉 능침 /믄화재청
강릉 능침 /믄화재청

 

명종은 어머니가 죽고 2년후인 1567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어머니 무덤 옆에 묻혔다. 강릉은 쌍릉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명종, 오른쪽이 인순왕후의 능이다.

인순왕후는 청송 심씨로 1551(명종 6)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세자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급서했다.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후사가 없어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양자로 입적시켜 대통을 잇게 했는데, 그가 선조다. 선조가 16세에 즉위하자 인순왕후가 8개월간 수렴청정을 한 후 물러났다. 인순왕후는 1575(선조 8)44세로 세상을 떠났다.

 

강릉은 여느 왕릉과 마찬가지로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석마, 문무석인 등을 배치했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어로, 정자각, 비각이 있고, 정자각 왼편에 왕의 우물인 어정(御井)이 있다.

 

강릉의 쌍릉과 정자각 /박차영
강릉의 쌍릉과 정자각 /박차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