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왜 축조했을까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왜 축조했을까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1.17 2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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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과 북한산성 연결…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보수, 탕춘대성은 방치

 

서울 종로구 홍제천 변에 있는 홍지문(弘智門)은 탕춘대성의 관문이다. 조선 숙종 41(1715)에 건립된 이 건축물은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했다. 앞면 3,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한양도성의 사소문의 모형을 따랐으며, 석축기단 위에 단층 문루를 올린 형태이다.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고 써서 편액을 달았다.

홍지문 옆 홍제천에는 수구(水口)5개인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 가로지른다. 대섯개의 아치로 구성된 홍예문(虹霓橋) 형식이다. 이 수문도 홍지문과 같은 시가에 만들어졌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1921년 홍수 때 붕괴되었다. 그후 50년간 방치되었다가 1976-77년에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수문의 규모는 길이 26.72m 6.8m 높이 5.23m.

 

홍지문 /박차영
홍지문 /박차영

 

이 지상의 문과 하천의 문은 탕춘대성을 쌓았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렇다면 탕춭대성은 꼭 필요한 성이었을까.

탕춘대성(蕩春臺城)은 한양도성의 소문인 종로구 부암동 창의문 서쪽에서 시작해 북쪽을 향해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홍제천을 건너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이르는 길이 약 4에 달하는 산성이다. 이 성은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연결하는 성으로, 도성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성(西城)이라고도 했다.

 

오간대수문과 탕춘대성 /박차영
오간대수문과 탕춘대성 /박차영

 

홍지문에서 보면 양쪽에 성터가 보인다. 그게 탕춘대성이다. 한쪽은 부암동에서 내려온 것이고, 다른 쪽은 상명대를 지나 북한산으로 가는 능선을 따라간다.

홍지문에서 상명대 구내를 지나 북한산 능선을 타면 성터의 흔적이 나온다. 보수하지 않은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성 벽에는 나무와 풀이 성벽을 타고 어지럽게 자라고, 성을 쌓았던 돌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저 등산로일뿐이다. 능선이 가파르지는 않다. 중간중간에 암문도 남아 있다.

이 성을 왜 쌓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양도성이 있고, 북한산성이 있는데, 두 성을 연결하는 성을 굳이 쌓을 필요가 있을까. 보수한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문화재 당국이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 같다. 지금은 등산객들을 위한 길을 제공해줄 뿐이다. 능선을 따라 가면 북한산의 한 봉우리인 향로봉이고, 비봉으로 연결된다. 성의 끝이 어디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성을 쌓다가 만 것처럼 보인다. 한참 오르다보면 바위다. 험준한 산세를 자연방어벽으로 활용한 셈이다.

 

탕춘대성 흔적 /박차영
탕춘대성 흔적 /박차영
탕춘대성 암문 /박차영
탕춘대성 암문 /박차영

 

이 성과 홍지문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숙종 37(1711)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도성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북한산성을 축성한후 44(1715)에 탕춘대성을 축조했다.

탕춘대성을 축조하는 문제로 조정에서 찬반 양론이 있었다고 한다. 찬성론자들은 북한산이 신라 이래 전략적 요충지이고,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수도 방위의 망을 촘촘히 하기 위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론자들은 산성과 도성 사이의 방어선을 형성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으며, 병력 또한 모자란다고 주장했다. 결국은 탕춘대성을 축성하자는 의견이 우세해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에 일단 완공했다.

지금은 창의문에서 출발하는 구간이 사라졌다. 홍지문 근처에 일부 남아 있다.

 

탕춘대성의 위치 /답사여행 길잡이(서울)
탕춘대성의 위치 /답사여행 길잡이(서울)

 

탕춘대성이라고 불린 것은 현재 세검정 동쪽 100m 되는 지점에 연산군이 풍류를 즐렸다는 탕춘대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을 쌓은 후 동쪽(성내)에 군사훈련장을 짓고, 총융청(摠戎廳)의 군량미 창고(상창)와 선혜청의 대동미를 보관하는 창고(하창)을 지었는데, 이 두 곳의 창고를 평창(平倉)이라고 했다. 평창동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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