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개최 카타르의 생존 방식
월드컵 개최 카타르의 생존 방식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1.1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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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 관계 이용하며 생존…진주 잡던 곳에 석유 터지자 강국 부상

 

통상 여름에 열리던 FIFA 월드컵이 이번에 11월에 열리게 된 것은 개최국인 카타르의 기후 때문이다. 카타르의 여름 낮 기온은 40~50°C에 이르고 바다에 인접해 습도가 높다. 온대지방에 사는 사람들로는 견디기 어려운 기온이다. 그래서 개최년도인 2022년를 넘기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늦춰 잡은 것이다.

카타르는 이슬람 국가로는 첫 월드컵 개최국이다. 이슬람권에서는 그동안 올림픽은 물론 월드컵을 한번도 개최하지 못했다. 투르키예가 2000, 2004, 2008, 20012, 2020년 등 다섯번이나 이스탄불 하계올림픽 개최를 신청했다가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비해 국제축구연맹(FIFA)이 더 개방적이다. 카타르가 걸림돌이었던 개최시기를 늦춰가며 이슬람국가로는 처음으로 월드컵 개최지로 낙점받은 것이다.

2022 월드컵은 또 코로나 바이러스 펜데믹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국제스포츠대회라는 점에서 전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카타르 도하에 있는 루사일 스타디움 /위키피디아
카타르 도하에 있는 루사일 스타디움 /위키피디아

 

카타르는 면적 11,581로 경기도와 비슷하다. 페르시아만 안쪽에 위치한 반도국가로 수니파의 종주국인 사우디 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며 바다 건너에 시아파의 종주국 이란이 버티고 있다. 중동에 종교적 대립이 악화되면서 이 나라는 수니·사아 양파에 중립을 견지하고 있다.

인구는 2020년 기준으로 280만명 정도인데, 이중 자국민이 30만명 정도, 나머지 다수는 외국인이다. 천연가스와 원유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돈 벌러온 외국인이 많고, 인구의 40% 정도가 인도·파키스탄인이다.

인구의 80%가 수도 도하에 거주하는 도시국가나 다름 없다.

 

아랍권 또는 중동지역에서 소국인 카타르(Qatar)가 과거 종주국인 투르키예나 이웃 대국인 사우디 아라바이와 이란을 제치고 월드컵을 개최하는 배경은 단연 에너지의 힘이다. 카타르의 석유매장량은 확인된 것만 150억 배럴이고, 천연가스 매장량은 전세계의 15%를 차지하며, 액화천연가스(LNG) 수출 1위 국가다.

국민 1인당 소득은 GDP 기준으로 8만 달러를 넘어 세계 4, GNI 기준으로 11위다. 아랍권에선 단연 1위다. 실업률은 1% 미만, 즉 완전고용 상태이고 빈곤인구가 없다. 법인 이외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 이 나라는 이웃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와 함께 알라신이 내린 천연자원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카타르의 위치 /위키피디아
카타르의 위치 /위키피디아

 

카타르라는 나라가 성립된 것은 1868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루이스 펠리 장군이 카타르의 부족국을 승인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카타르는 지명으로만 알려졌을 뿐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는 인정받지 못했다.

1세기에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가 카타레이(Catharrei) 지명을 언급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고, 2세기에 로마의 지리학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미가 아라바이 반도의 지도를 그리면서 카타라(Catara)라는 지명을 언급했다.

카타르는 낙타와 말 사육지로 알려졌고, 쿠웨이트, UAE와 함께 진주 조개잡이로 유명했다. 아랍과 중동의 일부로 세력이 변할 때마다 카타르 반도의 종주국이 변했고, 에미리트, 시크로 불리는 추장(부족장)이 부족을 이끌고 반도에 들어와 지배하다가 더 강한 세력에 자리를 내주길 반복했다.

현재의 카타르 군주 가문인 타니 가(House of Thani)가 사우디 사막을 떠돌다가 반도로 들어온 것은 1720년대다. 카타르엔 바레인, 사우디 아라비아, 페르시아, 오스만 투르크의 세력이 경쟁적으로 종주국 행세를 했다. 타니 가는 주변의 강대국을 적절히 이용했다. 바레인의 알 칼리파 가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때 사우디의 와하비 가를 이용했고, 사우디 가문이 종주국으로서 과세권을 행사하려 할 때엔 오스만 투르크를 끌어들였다.

영국과의 관계는 1821년 동인도회사가 해적이 숨어 들어간 도하를 포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도하의 원거주민들이 도망치자 타니 가문이 도하를 접수해 영국과 화친했다. 1867~1868년 카타르와 바레인이 무력충돌을 벌였을 때 영국이 개입해 두 나라가 상호 독립을 존중할 것을 중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타르는 영국의 보호를 요청하지 않았다. 카타르의 에미르는 오스만투르크를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1880년대에 오스만투르크가 카타르의 에미리트를 찬탈하고 세금을 과세하려 하자, 타니 가는 영국에 보호를 요청했다. 영국은 오스만투르크를 설득해 카타르의 자치권의 확대하도록 중재를 이끌어 냈다.

독일제국이 베를린-비잔티움-박그다드를 연결하는 이른바 3B 정책을 추진하며 중동에 영향력을 강화하자, 바레인과 걸프 연안의 에미르들은 영국의 보호를 요청했다. 1차대전 발발후 카타르는 오스만의 무력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영국에 보호령을 요청했다. 1916113일 영국과 카타르는 외교권과 군사권에 한해 영국이 행사하고 내치는 카타르 군주가 행사하는 내용의 보호국 조약에 합의했다.

 

카타르의 기름이 발견된 것은 1940년이다. 그 전에 진주 산업은 일본에서 개발된 인공진주에 의해 쇠퇴하던 차에 기름이 터진 것이다.

2차 대전 직후 인도와 파키스탄을 잃은 영국은 중동 산유국에 집중했다. 하지만 카타르는 더 이상 외세에 의존할 필요성이 없었다. 지하에는 신이 내린 엄청난 자원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카타르에 욕심을 냈지만 더 이상 군사력을 동원할 능력이 없어 페르시아만 내 보호국의 독립을 허용했다. 영국은 8개 에미리트(부족국)를 합쳐 연방을 만들 것을 제안했는데, 카타르와 바레인은 연방에 참여하길 거부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원했다. 나머지 6개 에미리트가 UAE로 독립했다. 카타르는 1971년 영국의 보호국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도하 진주섬의 주거지 /위키피디아
도하 진주섬의 주거지 /위키피디아

 

카타르는 절대군주제다. 에미르(emir)라는 군주가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권한을 쥔다. 2003년 제정된 헌법으로 의원 45명 중 30명을 직접선거로 뽑는다. 공식적으로는 헌법을 가진 준입헌군주국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절대왕정이지만 돈이 많기 때문에 다른 아랍국에 비해 너그럽게 통치한다. 전임 군주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는 1996 알자지라 TV를 개설하고, 1999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고, 2005년 성문헌법을 제정했다. 2008년에는 카톨릭 교회의 설치도 허용했다.

2013년 현 에미르인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가 에미리트로 등극했다. 에미르는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국왕이라고 한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Qatar

Wikipedia, United Arab Emirates

The Sporting News, Why is the World Cup being played in November, not in Qatar's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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