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했던 사직단, 일제와 현대 거치며 훼손
신성했던 사직단, 일제와 현대 거치며 훼손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11.2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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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와 농사의 신에 제사하던 곳, 한때 일본 신사도 설치…뒤늦게 복원중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에게 종묘사직은 왕실과 나라 그 자체였다. 종묘(宗廟)는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사직(社稷)은 토지 신과 곡식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왕실의 씨족을 모시는 곳이지만, 사직은 국가 그 자체였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수도 한양을 성리학의 원리에 따른 계획도시로 구상했다. 북악산의 정남쪽에 경복궁을 건립하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궁궐에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었다.

사직단이 있는 곳이 경복궁의 서쪽, 인왕산의 한 줄기가 흘러내려 오는 끝자락이다. 인왕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 산줄기와 일치시켰기 때문에 남북 방향에서 약간 틀어져 있다. 조선 태조가 건국후 한양으로 천도하며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사직단도 동시에 지었다. 태조 4(1395)년의 일이다.

사직단은 농경시대의 주신을 모신 곳이어서 신성한 곳이었다. 원래 사직단 자리는 매동초등학교, 어린이도서관, 단군신전, 황학정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 점령기에 공원을 만들고 일본 신사를 세우며 신성함을 잃어버렸다.

 

사직단 내부 /박차영
사직단 내부 /박차영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사직단을 가보면 문을 잠궈 놓아 문틈으로 내부를 볼 수밖에 없다. 안을 들여다 보면 두 개의 제단이 보인다. 동쪽의 제단은 토지의 신[]을 모시는 사단(社壇), 서쪽의 제단은 곡식의 신()을 제사하는 직단(稷檀)이다. 두 개의 제단은 각각 높이 1m, 면적 22평 규모의 정사각형으로, 각 면을 돌아가며 지대석·면석·갑석을 차례로 쌓아올렸다. 고종 때까지만 해도 3단의 돌계단으로 쌓은 두 개의 제단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제사는 매년 봄과 가을의 중월(仲月, 음력 2월과 8) 상순 무일(戊日)과 납일(臘日), 동지 후 셋째 술일(戌日))3번 올렸다. 정월에는 기곡제(祈穀祭), 가뭄에는 기우제(祈雨祭)를 별도로 지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으로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단만 남았다. 사직단이 완전히 중건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03(선조 36)에 사직단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전쟁이 끝나고 바로 재건된 것으로 보인다.

 

사직단 전경 /박차영
사직단 전경 /박차영

 

사직단의 개념은 농경시대의 산물이다. 농사가 주산업인 시절에 풍년을 빌고 추수를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고, 그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는 391(고국양왕 9)에 국사(國社)를 세웠고, 신라는 783(선덕왕 4)에 사직단을 세웠다. 고려는 991(성종 10) 처음으로 개경 서쪽에 사직단을 만들었고, 이런 전통은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한양의 사직단은 수난을 당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가 일본이 국권을 뺏은 후 1911년 사직단과 주변 토지의 소유권이 조선통독부로 넘어갔다. 1922년 조선총독부는 사직단 부속시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사직공원을 조성하면서 인왕산 자락에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던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서쪽에는 옛 경희궁에 있던 황학정이 이전되어 활터로 이용되어 신성함을 지웠다. 일제는 얄립게도 사직단 서쪽에 신사를 지어 참배하게 했다. 1960년대에 신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단군성전을 지었다.

 

단군성전 /박차영
단군성전 /박차영

 

해방후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사직단의 역할이 잊혀졌다. 해방 후 1962년에는 도시 확장으로 정문이 뒤로 이전되었다.

정부는 1963년 사직단을 사적 121호로 지정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는 북쪽에 종로도서관과 동사무소, 파출소가, 서쪽에 수영장 등이 건립되어 주변 환경이 다시 크게 훼손되었다. 현재의 사직단은 88올림픽을 앞두고 문헌 고증을 토대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사직대제 /문화재청
사직대제 /문화재청

 

제사는 순종 때인 1908년에 중단되었다. 그로부터 80년후인 198810월 종묘제례의 보유자인 고 이은표의 고증을 통해 사직제례가 복원되어 봉행되었다.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내에 있는 사직대제봉행위원회에서 사직대제를 보존·계승하고 있다. 제사의식은 소·돼지·양의 생고기를 비롯한 각종 곡식을 마련하고, 영신·전폐·진찬·초헌례·아헌례·종헌례·음복례·철변두·송신·망료(망예)의 순서로 진행된다. 사직대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돼 매년 9월 첫째 주 일요일 사직단에서 거행되고 있다.

 

사직대문 /박차영
사직단 대문 /박차영

 

사직단의 정문인 사직단 대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문은 태조 3(1394) 사직단을 지을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 뒤 숙종 46(1720) 큰 바람에 기운 것을 다시 세웠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 있는 자리는 1962년 서울시 도시 계획에 따라 14m 뒤쪽으로 옮긴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3·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새부리 모양의 부재를 이용해 기둥 위에서 보를 받치고 있다.

 

전사청 /문화재청
전사청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올해 5월에 사직 제례를 준비하던 곳인 전사청을 복원했다. 이곳은 제기고, 잡물고, 재생정, 저구가, 수복방 등의 건물과 제정(우물), 찬만대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사직단 내에 위치한 사직동주민센터, 사직파출소 등 일반시설물을 철거·이전해 안향청 권역 등을 복원하는 등 2027년까지 사직단 복원을 마칠 계획이다. 이를 통해 국가 제례공간으로서 사직단의 위상을 회복하고 정체성과 진정성을 되찾겠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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